[독자기고] 6.25 어찌 이 날을 잊으리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6/16 [01:04]

[독자기고] 6.25 어찌 이 날을 잊으리

통일신문 | 입력 : 2021/06/16 [01:04]

▲ 김한기 前 경북 노인지도자대학 학장  

임진왜란이 있기 전 이 율곡 선생은

‘일본군이 침범할지 모르니 10만 대군을

길러야 한다’ 고 주장했고 조정에서는

이 양병설을 묵살했다.


지구상 동족간의 전쟁으로 가장 처참했던 6.25 전쟁은 김일성, 마오쩌뚱 그리고 스탈린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계획한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방의 국군 기지는 일제히 포가 날아들었고 김포비행장은 무참히 폭격 당했다. 그리고 11만 1000명의 북한군이 불법으로 38선을 넘었다.

 

한반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날은 일요일, 국군장병들의 반 정도가 외출, 휴가 중이었고 이로 인해 전방의 병력은 굉장히 허술한 상태였다. 북한의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은 함락되고 우리의 정부는 대구로 피난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이 흘린 피는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했던 전투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었다. 만약 우리나라를 도와준 고마운 나라들이 없었더라면 전쟁은 패전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캐나다, 필리핀, 에티오피아 등 직접 전투에 참전한 16개국을 비롯한 의료지원 등으로 참전한 총 67개국의 도움이 있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은 UN 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지휘로 진행된 과감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7만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함정이 투입되었다. 성공적인 작전으로 UN군과 우리 국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파죽지세로 아군이 평양까지 함락하고 백두산 고지를 눈앞에 둔 상황이 되자 다급해진 김일성은 중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18만 명의 중공군이 꽹과리와 징을 두들겨 대며 쳐들어왔고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해야 했다. 인해전술의 중공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하나의 통일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을 것이다.

1953년 7월27일 김일성은 오후 10시 평양에서 휴전협정전문에 서명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조인에 성명을 발표하여 6.25전쟁은 휴전으로 막을 내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분단의 한반도로 남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137만 4195명에 달했고 파괴된 재산규모는 실로 막대했다.

6.25전쟁 71주년을 맞으며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 첫째,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며 둘째, 전쟁을 억제하는 강력한 힘을 길러야 할 것이며, 셋째는 전쟁에서 우리를 지켜준 UN 군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이 율곡 선생은 ‘일본군이 침범할지 모르니 10만 대군을 길러야 한다’ 고 주장했고 조정에서는 이 양병설을 묵살했다. 만약 10만 양병설을 받아들였다면 왜적을 무사히 격퇴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6.25 전쟁을 다시한번 상기하여 튼튼한 안보와 유비무환의 확고한 정신으로 국력을 길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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