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삶의 여정 - 진영옥씨

도우미로 일하며 세 아들 대학졸업을 시켰습니다

장운영 기자 | 기사입력 2021/07/22 [16:52]

탈북민 삶의 여정 - 진영옥씨

도우미로 일하며 세 아들 대학졸업을 시켰습니다

장운영 기자 | 입력 : 2021/07/22 [16:52]

60세 이후 가정 도우미로 일하면서 아들 셋을 대학공부를 시켰습니다. 50대에는 낮에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도우미 일을 했는데 60이 넘으면서 회사를 퇴직하고 아침부터 밤10, 때론 11시까지 도우미 일을 했습니다. 하루 세군데 이상 가정집을 다니면서 신혼집은 밑반찬도 담가주고 또 큰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주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서인지 가는 집마다 친절하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한 집에서 보통 4시간 정도 일을 하면서 3~4곳을 다니면서 한 달 150~180만원을 벌었습니다.

 

때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집도 있었지만 대개는 탈북자라고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니 도와주고 싶다면서 이해를 많이 해주더군요. 저는 처음부터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면서 요구조건을 말해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잘 가르쳐 달라고 먼저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2001년 남한에 왔습니다. 먼저 회사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은행도 다니고, 우체국, 구청에 가서 서류를 떼는 일 등을 했습니다. 당시 월급은 100만원이었습니다. 이 돈으로는 아들의 교육 뒷바라지를 하기가 어려워 회사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도우미 일을 시작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아들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운도 나고, 또 돈 모으는 재미도 생겼습니다.

 

젊은 새댁들에게 밑반찬을 해주면 맛있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도 흐뭇했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따 논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의 생활수준이 높은 이런 상류층을 다니면서 자존심이 상하기 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남한에서 이렇게 살아 보겠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이 가전제품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세탁기를 쓸 줄 몰라 당황했던 적이 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집집마다 약간은 다른 방식이어서 하나하나 적어 놓고 외웠습니다. 이제 반복되다 보니 적응이 되어 어렵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도우미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또 해 본 적도 없는 도우미(북한에서 식모라고 하는)일을 하면서도 부담감을 갖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사업을 하면서 조금은 낳은 생활을 했지만 남한에 왔으니 북한에서의 생활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받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이곳에서 내 몸을 낮춰 밑바닥 생활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낯선 곳에 와서 이만한 생활을 한다면 괜찮습니다. 잘 사는 집의 냉장고에 이름도 모를 음식이 가득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서 저도 열심히 일해 이렇게 해 놓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가끔 남한의 젊은이들이 풍족하게 살면서 행복해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에 한번 다녀오면 어떨까요?

 

저는 힘들었지만 부지런히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해 세 아들 대학을 졸업시키고 큰 아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중국 아가씨를 며느리로 데려왔습니다. 둘째 아들도 취직을 했습니다. 이제 60대인 저는 행복을 못 누렸지만 아들은 남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게 제 행복입니다. 아들들이 이제 도우미 일을 그만 하라고 합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남한에 와 살면서 느낀 것은 갑작스런 통일은 남북한 모든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북한과 남한의 경제, 그리고 사람들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과 비슷하게 경쟁력을 갖춘 후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곳에서 살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제 제 꿈은 손자들을 잘 돌보고 아들이 이곳에서 잘 살아 가는 것입니다.

 

장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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