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기획 인터뷰] 통일의 선행조건인 “국민통합이 최강의 안보”라 주창해 온 ‘통합주의자’

(사)국민통합비전(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홍원식 이사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8/11 [20:50]

[광복절 기획 인터뷰] 통일의 선행조건인 “국민통합이 최강의 안보”라 주창해 온 ‘통합주의자’

(사)국민통합비전(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홍원식 이사장

통일신문 | 입력 : 2021/08/11 [20:50]

[광복절 기획 인터뷰] 통일의 선행조건 “국민통합이 최강의 안보”라 주창해 온 ‘통합주의자’

(사)국민통합비전(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홍원식 이사장

 

 

 


- ‘통일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9년 국회가 <백범서거50주기 특별공연예산>을 의결해 놓은 상태였으나 ‘공연준비위원회’에 내분이 일어나자 문화관광부(당시)가 공연 취소를 결정을 했다. 내분을 틈타 집행위원장이었던 김 모씨가 각계 명사들이 낸 후원금을 쥔 채 종적을 감췄다. ‘백범추모특별공연’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던 신창균 선생님(한독당 상임위원)께서 저를 ‘총괄대변인’에 임명하며 수습을 부탁하셨다. 저는 ‘무보수’를 전제로 1년 한시직으로 직책을 맡아 내분을 수습하며 ‘문광부’ 항의 방문을 반복해 공연을 재개토록 했다.

이후 후원회장단(이수성 전 국무총리, 변정수·조승형 전 헌법재판관)을 조직했고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으로부터 공연기금 3억 원을 기증받았다. 백범서거50주기 추모공연(예술의 전당, 1999.12.5~6.)은 성공리에 거행될 수 있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되었는데, 북한에서 날라 온 팩스 한 장이 내 인생역정의 항로를 ‘통일운동가’로 변신케 하는 촉매재가 됐다.

 

- 북한에서 어떤 팩스가 온 것인가?

신창균 위원장님은 김구 선생님의 최고 측근 중 한 분으로 <‘48남북연석회의(평양)> 당시 김일성 위원장(당시)과 회담을 하신 바 있다.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김영대 회장(당시)이 신창균 위원장께 <남북공동백범추모행사> 개최하자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북측이 제안해 온 남북공동행사를 위해서는 법인격을 갖춘 단체가 필요했던 터라 신 위원장님께서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현재 국민통합비전) 창립 업무를 저에게 전담시키셨다. 

남북관계 업무의 성격상 고시헌법 강의와 병행이 불가능해 강의를 접은 뒤 ‘백범사상’을 주제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로 <국민통합과 통일비전> 전문가로 삶의 궤도가 옮겨졌다.

 

남북관계 업무 성격상 고시헌법 강의와

병행 불가능해 강의 접은 뒤 ‘백범사상’

주제로 법학박사 학위 취득하고, 이후로 

국민통합과 통일비전 전문가로 삶 변화

 

-백범 김구선생 관련 새로운 단체를 만든 이유는?   

기존 단체인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국민세금과 국민성금으로 지어진 <백범기념관>을 관리하며 백범 선생님의 차남인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께서 회장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소천(2016.5.19.)하셨다. <국민통합과 통일>은 ‘백범정신’의 농축이건만 생존시 김신 회장께서는 북한과의 공동행사를 반대했다. 임시정부 시절 ‘한독당 재정부장’으로 백범 선생님께 재정적 후원을 해 온 신창균 위원장님의 ‘통일운동’도 터부시 했다. 도리 없이 신창균 선생님의 뜻에 따라 보수, 진보는 물론 중도 통합적 지도자들을 모시고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이라는 비영리법인을 창립(2001, 통일부 등록)하게 되었다. 

 

-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인데, 이유가 무엇인가?

저도 나중에야 알았는데, 백범 선생님 서거 후 김신 회장님이 걸어온 길이 그분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최강의 병력인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김신 회장은 오히려 <국가재건최고위원>이 되었다. 이한림 2군 사령관이 쿠데타군을 섬멸하려다 김신 공군참모총장이 쿠데타군에 합류한 것을 알고 포기했다. 

엄밀히 말하면 김신 장군이 ‘5.16쿠데타’ 성공에 ‘절대적 공헌’을 한 것이다. 이후 ‘주타이완대사’ ‘교통부장관’,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박정희 치하에서 18년간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여정에서 김신 회장님은 ‘반백범적 행태’를 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의 관계는 어떤가?   

신창균 총재님이나 저는 김신 회장님의 이러한 행태에 개의치 않고 줄곧 <섬김과 통합>이라는 ‘백범정신’으로 예우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진정성을 아시게 된 후로는 저를 식사에 초대해 ‘동지’라 부르시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2011년 1월 3일에는 인사차 예방한 저를 김신 회장님이 백범 선생님 좌상 앞으로 안내해 함께 기념촬영과 덕담을 해 주신 바도 있다. 하여 저는 김신 회장님이 소천하셨을 때 장지까지 가서 예의를 갖췄었다. 이처럼 우호적 관계였던 이 단체가 최근 ‘반백범적 행태’를 보이고 있어,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반백범 행태’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백범기념사업협회’와 달리 우리 단체는 창립 2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단 1원의 국고보조금 공적 자금지원을 받지 않고 17차례의 북한을 왕래하며 '남북공동행사'를 진행하는 등 백번정신의 실천을 위해 매진해 왔다.

또한 전국의 민,관,군을 순회하며 “국민통합이 남북통일의 선행조건이며 국민행복의 원천”이라는 <백범정신>을 확산시켰다. 환대해야 마땅한 우리 단체의 활동을 명백히 방해하는 행태를 취하고 있다. 유족들에게 저간의 사정이 있어서인지 김신 회장님의 유족 중에서는 사위인 ‘빙그레그룹’의 김호연 회장만 이 단체 등재이사이다. 최종적으로 김호연 회장과 담판을 해 본 뒤 청와대 ‘국민청원’을 포함한 대응을 하고자 한다.

 

전국의 민,관,군을 순회하며 국민통합이 

남북통일 선행조건이며 국민행복의 원천

백범정신을 확산…환대해야 마땅한 단체

활동 방해하는 행태 취하고 있어 아쉬워

 

-분위기도 바꿀 겸 ‘백범의 꿈’인 <통일> 이뤄질 것으로 보는가?

말씀드렸듯 ‘백범정신’은 <국민통합과 남북통일>로 압축된다. 백범 선생님의 『남북통일=세계강국』이라는 통찰은 세계적 투자가인 짐 로저스(Jim Rogers) 등을 통해서도 검증되었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백범의 꿈>은 ‘외세’와 남북한의 ‘반통일세력’으로 인해 실현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외세 1호’는 ‘8.15 항복’ 전에 한반도를 분단시켜 ‘6.25’를 발판삼아 경제부흥을 이룬 <일본>이다. <미중밀약(1972.2.21.)>에 근거해 유사시 북한지역을 자국 영토로 삼고자 하는 <중국(2019.5.2. ‘VOA’ 보도)은 ‘외세 2호’다. 일본과 ‘한반도분단정책’을 철통공조를 하며 중국과의 G2패권 전술의 일환으로 ‘남북경색’을 활용하고 있는 <미국은 ‘외세 3호’>이다. 

 

-통일을 가로막는 내부요인은 무엇이며 극복할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외세’와 영합한 남북한의 반통일세력이 ‘백범의 꿈’을 가로막는 민족 내부요인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통일의 필수적 선행조건인 ‘국민통합’이 안 되어 있는 점이다. 짐 로저스를 위시한 세계적 투자가들이 ‘남북협력’만 해도 한반도가 세계적 비전의 요람이 될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통일독일’을 교훈 삼아 ‘국민통합’에 국가역량과 국민의지를 모아야만 ‘살길’이 있다. ‘국민통합’이 <최고의 안보>이자 <최상의 경제>이기 때문이다. 외면 받고 있는 ‘국민통합’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우리 단체는 <“존중합니다!” 캠페인>을 전개해 통일독일의 시금석이기도 한 『타인존중=국민통합=헌법작동=국민행복』이라는 ‘통합주의’를 확산해 가고 있다.   

 

 

 



국민통합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창립 

20주년 맞은 단체로 ‘존중합니다’ 캠페인

전개…통일독일의 시금석 ‘타인존중=국민

통합=헌법작동=국민행복’ ‘통합주의’확산

 

-‘존중합니다! 캠패인’ 어떻게 진행해 갈 계획인가?    

제대로 된 통합교육을 받아 본바 없는 사람들도 『소통=통합=행복』의 통합의 순환논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첫 단추가 자기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구성원에 대한 ‘존중’임을 간과하곤 한다. 서울에서 제주에 이르기까지 민,관,군 초청을 받아 “존중과 섬김”을 핵심으로 하는 ‘국민통합교육’을 전개해 왔고 그 반응은 대단히 뜨거웠다. 코로나펜더믹으로 인해 한계가 있지만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부단히 확산해 가고자 한다. 

 

- 17차례의 방북 기간 중 기억에 남는 일은? 

2004년 7월 22일, 남북 당국 승인 하에 북한에 제 책 6천 권을 보급한 일이다. 사회과학류 책으로서는 남북 분단 이후 최초 사건이어서 TV, 신문 등 각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듬해 10월 14일에는 북한 비행기인 고려항공 전세기 2대로 <평양 방문단>을 꾸려 <남북백범포럼>을 성공리에 마친 일도 기억에 남는다. MBC 뉴스데스크팀이 동행해 평양 현지 상황을 취재해 보도(2005.10.16.)했었다. 여섯 차례의 육로 방북 당시 남북한 헌병대 안내를 받아 ‘남북경계선’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느꼈던 ‘분단의 아픔’도 절절하게 남아있다. 토양이 척박한 북한의 만성적 식량난 해소 대책으로 우리 단체가 전개하게 된 <북녘땅에 유기질비료 ‘뿌리기’운동>을 해내외 동포를 망라한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해 ‘분단의 아픔’을 해소해 가고자 한다. 

 

- ‘백범정신’ 실천 여정에서 보람이 있다면?   

‘백범’은 『백정범부(白丁凡夫)』의 약칭이다. 인구수에 포함되지 못했던 ‘민초’들인 ‘백정’들까지도 존중하며 섬기는 삶을 소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백범 선생님의 삶에 감명을 받은 저는 1991년부터 7년간 매월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양무리마을(정신지체장애우시설/당시)’을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며 ‘백범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는 수원에 있는 ‘경동원(7세 이하 아동보육시설)’에 백범정신을 실천했다. 믿었던 후배의 배신으로 인한 보증사고 피해가 커지면서 중단해야 했지만 20여 간의 ‘백범정신’ 실천 여정의 보람을 약자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을 통해서 느끼고 있다. 아들이지만 존경스러울 정도다.

 

- 아들이 존경스럽다? 생소한 말이다.

‘백범정신’의 출발은 사람에 대한 ‘존중’, 특히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한다.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중대장이었던 둘째 아들이 지난 6월 말일에 전역을 했다. 자기 부하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복무 자세에 여러 차례 감동 받은 바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전역 전날 홍소망 대위(차남)를 초대해 기념촬영(사진)을 하고 정중히 식사를 대접했다. 맹추위 속 야산에서의 야전 훈련시 갓 전입해 온 신병이 낡은 침낭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워 자기 침낭을 주고 그 부하의 침낭에서 잔 것과 홍 대위의 직속상관이 자신의 부하에 대해 불법적 징계를 시도하는 상황에서 관계 법령을 들며 부하를 보호하려다 홍 대위 자신은 물론 부대원들까지 고초를 겪은 일들에 대해서 진심 어린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중·고교 6년 동안 거의 모든 일요일애 지역의 ‘상록회’ 어른들을 섬기던 성정이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지고 있어 감사하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었던 ‘고시헌법 강사’ 자리 대신 ‘통일’을 지향하는 비영리사단법인 운영자의 길을 걷다 보니 자녀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한 것은 아비로서는 뼈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삶을 경주하는 차남을 보면서, 여러모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백범정신’ 실천의 삶을 살고자 했기에 누리게 된 ‘천부적 은혜’라는 생각이 들어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자신을 희생해 싹을 띄우는 한 알의 밀알이 될지라도 후대에 자신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오길 백범 선생님은 소원(월간지 활천 230호,1946)하셨다. 이러한 <백범정신>을 품고 한반도 중심의 ‘유시코리아’ 시대 창출을 통한 인류행복과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통합형 리더들의 요람>을 구축하고자 하는 ‘비전’을 이룸으로써 나 역시 새로운 대한민국의 ‘밀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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