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뭐며 다 하고 나선 나머지 시간을 뭘 하며 보낼까를 생각한다. 답은 늘 비슷하다. 꼭 할 일 끝내면 텔레비전에서 미국 프로 야구 중계를 보지 않으면 (류현진이 등장하는 날은 TV에서 중계를 안 해 줘 핸드폰으로 본다) 시사프로를 보고나, 마땅치 않으면 곧장 영화프로를 검색한다. 영화를 좋아해서 지만 영화 이상 재밌는 게 없기 때문이다. 마침 TV에서 볼만한 영화가 방영되면 우선 핸드폰에서 평점을 찾아보고 높게 나왔으면, 대개 7점 이상이면 본다. 아니면 영화 VOD를 검색한다. 코로나 탓도 있지만 요 1년여를 매일 영화 2편 정도는 봤을 것이다. 킬링타임 영화가 대부분이긴 해도 내게는 영화처럼 고마운 게 없다. 우선 하루를 지루하고 짜증나게 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이상 고마울 데가 어디 있나. 그것도 수고스럽지 않다. 또 돈 나가는 것도 아니며 선택권도 당당히 내게 있다. 자의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영화라도 내 마음대로 선택해 볼 수 있다는 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영화에 푹 빠져 살다시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즐거워하며 사는 건 아니다. 우선 영화를 계속 보고 싶어도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눈이 침침해져 오랜 시간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영화 대부분이 시리즈여서 계속 보면 좋겠건만 두세 편 보면 눈이 아파 더 볼 수가 없다. 그래 할 수 없이 안과 병원에 가면 아무리 백내장 수술을 받았어도 늙으면 할 수 없단다. 조물주께서 조금만 더 인심을 써 주시면 좋겠지만 절제하라는 뜻으로 알고 꼼짝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다. 제일 아쉬운 일이다. 영화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영화에 파묻혀 살 수는 없다. 전에 영화 검열을 하던 친구는 만날 때마다 매일 쉴 사이 없이 영화를 보느라 눈이 짓무르고 머리가 깨지듯 아프다고 하소연하곤 한다. 그때마다 남들 못 보는 영화 다 보고 그것도 돈까지 받으면서 보고 있는데 무슨 비명이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위로의 술 한 잔 마시며 영화 검열하면서 잘라버리는 야한 장면이란 게 어느 정도이며 폭력 장면은 얼마나 끔찍한지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내 작품에 한껏 반영할 속셈에서다. 어쨌거나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인지 본인이 보고 싶으면 야하디야한 영화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무지막지한 폭력 영화도 여한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나는 만년에 영화라는 행복의 동반자를 끼고 살고 있다 할 것이다. 영화만이 아니다. 책도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볼 수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독서시간도 길지가 않다. 눈이 진물진물 하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무슨 글이고 봐야 잠이 오는 습관이 있어 머리맡에 책을 놔두건만 몇 페이지 보지 못하고 덮어버리고 라디오를 켠다. 젊은이들은 매일 할 일 없이 유유자적하는 늙은이 모습을 보고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다. 허구한 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한바탕 교통전쟁을 치르고 나면 냉혹한 직업전선에서 또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니 하릴없이 사는 늙은이 하루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 하긴 50줄에 들어선 내 자식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사전에 내게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코앞에 닥쳐서 일방적으로 부탁을 하는 일이 있곤 한다. 늙은이에겐 하루가, 시간이 언제나 넉넉해 보이나 보다. 젊은 저희와 다 똑같은 하루요 똑같은 24시간인 줄 아는가 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며 착각이다. 나이 많은 (80대) 늙은이의 하루와 한 시간은 인간의 자로 잴 수가 없는 시공이다. 확실하게 약속된 하루이며 시간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인지도 모르게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늙은이의 하루와 한 시간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며 뭣과도 바꿀 수 없는 시공인 것이다. 그런 하루와 시간이 사라지고 있는 거다.
박신호 방송작가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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