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영의 은빛세월] 9월이면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9/05 [18:45]

[장운영의 은빛세월] 9월이면

통일신문 | 입력 : 2021/09/05 [18:45]

▲ 장운영 통일신문사 발행인     

이른 새벽 문득 들려오는 귀뚜라미소리, 은빛세월의 마음에 앙금처럼 갈아 앉았던 그리움이 물살져 온다. 9월은 늘 그렇게 추억의 계절로 다가와 애수어린 청아한 풀벌레들의 화음을 풀어주고, 은빛세월을 고향풍경과 소리에 취하게 했다.

 

9월의 고향, 새벽을 깨우던 귀에 익은 소리가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난다. 할아버지의 헛기침, 그리고 담뱃대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하루는 고향의 모든 사람을 부지런하게 했으며, 온 마을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외양간에서 누렁이 암소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 아버지의 연장 챙기는 소리에 이어 어머니의 종종 발걸음이 뜨락 가득 넘친다.

 

우리는 잠결에서도 이 삶의 소중한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행복한 유년의 꿈을 키웠던가. 아직 덜 깬 잠을 털며 올려다 본 하늘에 해맑은 그믐달이 앞산 중턱에 걸린 채 수줍은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향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절마다 자신의 빛깔과 향기로 변화하는 마을의 풍경은 우리의 눈을 얼마나 황홀하게 했던가.

 

9월이 시작되면 마음은 더욱 풍성해지고 여유로웠다.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근처 강둑에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명랑하고, 윤기가 흘렀다. 마지막 여름 한나절을 장식하는 매미들의 합창 또 한 참으로 정겨웠다.

 

은빛세월이 9월 새벽 꿈속에서 만난 고향의 풍경과 소리는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이라고 자신을 달랜다.

 

그러나 몇 일후면 실향의 은빛세월 마음과는 상관없이 각종 매스컴은 민족의 대 이동을 보여줄 것이다. 조상의 묘역에서 술한잔 올리지 못하는 불효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탈 없이 성장한 아들, 며느리, 손자들 손잡고 조상님 앞에 둘러앉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한 듯 여겨지기도 하는 은빛세월의 요즘 심정이다.

 

이런 저런 우울한 심사에다 고향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이 겹쳐 올해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한가위라는 말조차 잊어버리고 굶주리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향의 이웃들이 떠오른다. 이들 속에 은빛세월의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고 형제들이 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이 순간 한없이 느껴지는 자신의 무력함...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다시 묻고 있다.

 

* 은빛세월이란 실향민을 지칭한다. 1998년 당시에는 천만 실향민이 있었다. 그들을 위로 하는 차원에서 쓴 글로 계속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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