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넓은 선천(평북)벌은 부서져 나뒹구는 철모와 탄피로 덮여 있었다”

[맹동욱 러 공훈예술가의 체험수기-3부] 북한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당시 북한 실상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2/08/18 [23:31]

“고향의 넓은 선천(평북)벌은 부서져 나뒹구는 철모와 탄피로 덮여 있었다”

[맹동욱 러 공훈예술가의 체험수기-3부] 북한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당시 북한 실상

통일신문 | 입력 : 2022/08/18 [23:31]

맹동욱은 고향 성진(현재 김책 시)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생전 고향의 부모, 형제 혈육 등 친구들과의 소식은 영영 끊겨야 했다. 그 후 25년 이상 타지생활을 카자흐스탄에서 오직 학문(희곡관련/알마아타 청년극단)에 몰두한다.

세월흐름에 따라 그는 소련 땅에서 연극, 미술대학교수가 되고, 1973년 소련작가연맹 맹원이 됐다. 78년에는 고려인(소련동포)으로서 일찌감치 영예의 “러시아 공훈예술가”칭호를 받았다. 훗날 1989년 맹동욱은 한국으로부터 소련대학 교수신분으로 초청돼 비로소 자유의 땅 대한민국을 방문한다. 한국 언론에 그의 초청방한이 알려지고, 그때 비로소 진작 월남했던 일부 고향사람들과의 눈물겨운 해후가 김포공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고향 성진 쌍포고개에서 첫사랑인 정옥이가 할머니가 돼 호텔로 찾아와 만나는 극적인 장면은 꾸며진 소설스토리처럼 감동적이다.

인민군대사열 중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열단장 친척 김철우 아저씨를 만난 얘기부터 이어간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나니 반가움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철우 아저씨가 소련군 고문을 향해 러시아어로 뭐라 한참 이야기하니 그 고문도 내 어깨를 정답게 치면서 ‘하라쇼(좋다)’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 사건은 군관학교 내에 큰 사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교관의 나에 대한 태도도 부드럽게 돌변했다. 교관은 내게 어떻게 정치부 군단장을 아느냐고 조용히 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철우아저씨가 군단장이란 걸 알게 됐다. 뜻밖에도 나는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며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했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내가 철우아저씨를 처음 본 것은 11살 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불붙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동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었다. 그때 우거진 풀숲사이에서 누군가 애절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얘야, 아이구 얘야?” 나는 소리 나는 곳을 찾아서 풀속 깊이 들어갔다. 풀 속 큰 나무 밑에 한 사내가 거의 죽어가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곧 아버지께 알렸다. 우리는 나무하던 것을 중단한 채 수레에 죽어가는 그 병자를 실었다. 아버지는 병자 몸 위에 풀잎을 덮어 퇴비더미로 위장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골방에 감추어두고 열심히 간호했다. 그는 소련 극동 군사정치위원회로부터 특별 임무를 받고, 일본군 군사기지를 정탐하기 위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 북방에 왔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열병에 걸렸으나 일본군과 경찰에 발각될까봐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몸으로 옥천동에 있는 친척을 찾아오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옥천동 그의 친척은 바로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 집이었다. 당시엔 그런 사람을 스파이라고 해서 일본경찰에 반드시 보고하게 돼 있었다. 만약 집에 감추어둔 걸 걸리면 숨겨준 사람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몰살을 당했다.

우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살려낸 것이다. 병이 거의 낫자 그는 옥천동에 가서 농사꾼으로 위장하고 해방된 날만 기다렸다. 또 가끔 장평동에 있는 우리 집에도 놀러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망하고 소련군이 승리하면,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내쫓고 우리나라는 독립국으로 해방된다고 말했다.

그날을 아버지도 나도 모두 손꼽아 기다렸다. 45년 8월 소련군이 함북 청진에 상륙하자 아저씨는 감격에 겨워 소련군 선봉장을 만나 러시아 어로 뭐라고 얘기를 했다, 그러나 소련군 장교는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덮어놓고 팔목에 수갑을 채우고 멱살을 잡고는 북으로 가는 열차에 태웠다.

소련군 장교는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러시아 잘하는 사람을 만나자 전에 정치공작원으로 나왔다가 적에게 투항한 자로 의심해 군사재판에 넘긴 것이다.

그것이 내가 철우아저씨를 본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철우아저씨가 북방 어디선가 총살을 당해 까마귀밥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5년이 지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를 만나고 보니 기쁜 마음에 앞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넘긴 그 여러 위험한 고비들이 생각났고, 잊으려 애쓴 아오지의 아픈 기억이 다시 나를 찾아와 가위 놀리게 했다.

그때 그는 어디 있었는가? 어깨 위의 큰 별을 달고 그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그토록 염원하며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했던 해방된 조국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나는 그동안 내가 겪어온 고통들을 그 앞에 털어놓고 싶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에게 매달려 내 앞일을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만나자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황급히 가버렸다.

그날 밤, 나는 인민군대에 끌려온 후 처음으로 밤새워 고향집과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며 베개가 젖도록 울었다. -두만강변의 경비초소에서 도망갔던 친구들은 어떻게 됐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내 모든 궁금증들-이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포중대 지휘소대장이 되다

중대장은 엄격한 규율과 체벌로

부하를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믿음으로 다스렸다

 

얼마 후 나는 19연대 76밀리 포 중대 지휘소대장으로 임명돼 생소한 대원들을 접수했다. 이 대원들의 목숨을 이제는 내가 책임지게 된 것이다. 우리 부대는 전선으로 출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내 직속상관인 중대장은 함북 길주 출신의 폐병환자였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핼쑥한 얼굴로 몸 어느 구석에도 전사다운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군대에서 통용되는 폭언과 명령어를 쓰지 않았고, 늘 시선을 먼 곳에 던지곤 사색에 잠겨 있곤 했다.

그러나 박식했다. 수학, 물리, 문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저녁마다 중대본부에 전사들을 불러놓고 금지돼 있는 유행가까지 같이 부르며 향수를 달래 주었다. 또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소련과 중국에서 나온 고관들까지 그와 군사전략 작전을 의논하고 그의 제안에 탄복했다.

그는 단지 국내출신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위로 진급하지 못하고 중대장에 머물렀다. 나는 직속상관인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도 나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다. “이봐, 지휘소대장은 중대장을 대신하는 중요한 직책이야. 중대본부에서 나와 함께 잘 지내자!”

중대장은 모든 부하의 이름을 외웠고, 그들 하나하나 출생지와 소질, 특기까지 죄다 알고 있었다. 누가 규율을 위반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중대본부에 불러다놓고 담배도 같이 피고 인간적으로 타일러 설득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과 체벌로 부하를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믿음으로 다스렸다. 자연히 부대원들은 중대장을 존경하고 따랐다.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죽이고, 피를 나눈 부모와 형제끼리도 총부리를 들이대는 인간상실의 시대에 우리 중대장과 같은 상관을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6.25전쟁은 중공군의 개입과 인해전술로 인해 상황이 뒤바뀌어 남한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흥남철수에 이어 원산, 평양 등지에서 차례로 후퇴했다. 전장은 참혹한 상흔만을 남긴 채 다시 38선 부근으로 옮겨졌다.

인민군은 중공군에 비해 수적으로나 무기 등 장비로 보나 군대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보잘 것 없었다. 중공군은 동부전선의 일부를 인민군에게 맡기고, 그들은 중부와 서부전선 그리고 후방과 해안전체를 방어했다. 북한거리와 마을 산간벽지까지도 군용품을 실은 중국화물차로 길이 메워졌다.

우리 부대는 중국의 군관학교를 떠나 평안북도 선천까지 나왔다. 우리 앞에는 화물차, 포 마차, 출전하는 인민군과 중공군 대열들이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남으로 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래 만에 보는 고국의 산과 들은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노랑머리, 검은 다리 등 유엔군 참전 군인들의 주검이 도처에 있었고, 대기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특히 중공군의 시체가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그 넒은 선천(평북)벌은 부서져 나뒹구는 철모와 탄피로 덮여 있었다. 거리엔 온통 중공군만이 득실거릴 뿐 우리 동포들의 얼굴은 찾기 힘들었다. 미군이 남하하면서 원자탄을 던진다는 소문에 모두 고향을 버리고 빈손으로 국방군을 따라 남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 군대는 다시 평안북도 정주까지 나왔다. 머리위에선 미군기가 밤낮없이 폭탄세례를 퍼 부었고, 폭탄 터지는 소리와 자욱한 포연으로 후방임에도 불구하고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지휘 소대장! 어떤 경우에 닥치더라도

희망을 버려선 안 돼. 장애물과

부딪칠수록 더 많이 꿈꾸어야 하는 거야”

 

정주에서는 약10일간 상부지시를 기다리며 땅굴을 파며 지냈다. 그런 어느 날 포로들과 변절자들을 실은 화물차가 한 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가 판 땅굴에 처넣을 ‘예비 송장’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바로 아오지에서 정치범들을 개 패듯 했던 흉악범 조장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까이 가서 그자인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자는 죽음을 앞두고 얼이 빠져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살려만 주십시오. 나는 조금도 투항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 악질 조장은 두 손을 부비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안전군관의 두 다리를 잡고 애원했다. 다른 포로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의연한데 이 비겁한 자만이 애걸복걸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아오지에서는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정치범들을 철사로 몽둥이로 때로는 쇠망치로 때려 죽였던 인간이, 죽은 사람 사지를 끌고 다니며 시신까지도 모욕했던 짐승보다도 못한 자가, 남의 생명은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인간 망종이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그렇게 겁에 질려 있는 꼴이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안전군관도 그의 꼴이 보기 싫었던지 첫 번째로 그의 가슴에 총울 쏘았다. 일순 괴기스런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어서 들리는 총소리가 계속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마음이 심란해져 막사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중대장은 내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습니다.”

“지휘 소대장! 어떤 경우에 닥치더라도 희망을 버려선 안 돼. 장애물과 부딪칠수록 더 많이 꿈꾸어야 하는 거야.” “중대장 동지! 이 땅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같은 민족끼리 국토를 온통 쑥밭을 만들어가며 싸워야 합니까?” “모든 게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지.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

중대장은 말을 하다말고 자지러지게 기침을 하더니 울컥 핏덩이를 토해냈다. 나는 어떻게 그를 도와야 할지 당황했다. “놀랄 것 없어. 곧 괜찮아 질 거야.”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이야기를 계속하려 애썼다.

“지휘소대장은 예술가가 될 사람이야. 앞으로 큰 예술가가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내 존재에 대해서도 기억해 주게. 나는 머지않아 죽게 될게야.” “그런 죽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중대장에게 내일이 없다면 내게는 내일이 있는 것인가. 죽음의 그림자만이 덮여있는 산하에서, 오늘은 우리가 이기고 또 내일은 적이 승리하는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꿈꾸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술가의 꿈이란 전쟁의 포연 속에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날 밤 나는 내 앞의 생과 정옥이를 생각하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분대장이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소대장 동지! 전사 김종호가 후방에 식량을 가지러 갔다가 총을 잃었습니다.” 분대장의 다급한 보고에도 정작 무기를 잃은 김종호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얼굴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 “목숨과 한가지인 총을 어떻게 잃었나?” “트럭에서 졸면서 오다 도난당한 모양입니다.”

분대장은 울화가 치미는 듯 평소 보고하지 않았던 못마땅한 일들도 털어 놓았다. “전사 김종호는 우리분대의 골칫거리입니다. 규율위반은 예사이고 조기체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러운 손과 목을 좀 보십시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수를 하지 않겠답니다. 땅굴도 파지 않으며, 식사당번 때는 밥을 태워 분대원들을 굶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놈은 군사재판에 넘겨야 합니다.”

“좋아. 이 일은 내게 맡기고 분대장동무는 돌아가서 쉬시오.” 분대장은 분에 못 이겨 식식거리며 김종호를 힐끗 건너다보고는 가버렸다.

 

바이올리스트 김종호

애티가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지옥 같았던 아오지

탄광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김 동무! 그러지 않아도 김 동무의 평소 소행이 돼먹지 않아서 한번 만나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소. 이제 무기까지 잃었으니 우리 소대전체가 책임져야 할 큰일을 저질렀소. 어떻게 하겠소?”

김종호는 내 말에도 비식 웃기만 할뿐 뻣뻣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우선 무기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상부에 보고하면 군사재판에 넘길 게 뻔하오. 전시에 무기를 잃는 것은 총살감이요.” “소대장동지! 그럼 저는 총살을 당한단 말입니까? 나는 절대로 여기서 죽을 수 없습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난 결코 죽어선 안 됩니다.” 그는 풀이 죽어 계속 죽을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니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않게 우리끼리 해결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나는 아직도 애티가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파출소에서 무기를 훔친 일, 생지옥 같았던 아오지 탄광에서의 일등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가? 나는 군대사회의 규율에 반항하는 전사 김종호 모습에서 내 지난날의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 방법을 생각해봤나?” “생각나지 않습니다. 소대장 동지라면 무기 한 자루쯤이야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뾰족한 수가 없소.” “그럼 이대로 죽어야한단 말입니까?” “하, 김동무는 다른 사람은 어찌되든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이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에겐 없는 내 특별한 재능을 죽이기 싶어서입니다.” “그게 뭐요?”

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그의 손과 목은 하도 오랫동안 씻지 않아 참나무껍질처럼 온톤 더께가 얹혀 있었다. 나는 속으로 김종호가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다.

“소대장 동지!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전쟁 전에 음악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국제 바이올린 대회에도 참가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요.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무조건 인민군대로 몰아낸 겁니다. 제 손을 보십시오. 바이올린을 켜기 위해선 손이 부드럽고 섬세해야 합니다. 그래서 손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씻지 않는 겁니다. 땅굴을 파고 험한 일을 하는 이 손으로 다시 바이올린을 켤 수 있을지..”

냉소만을 띠던 종전까지의 그의 표정은 바이올린 얘기가 나오면서 뜨거운 열정으로 이글거리며 눈이 번득였다. 그러나 이내 그 눈 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전쟁은 몇 번이나 나를 죽였어요. 우레와 같던 박수소리와 꽃다발은 간곳이 없고, 지금 내겐 멸시와 조롱뿐입니다. 어디서나 정신병자취급을 받지요. 그러나 이 모든 수모를 나는 위대한 음악가라는 자부심 하나로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음악은 나를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의 말은 내 혈관 속에 잠들어 있던 문학에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뻐개지는 듯 통증을 느꼈다. 김종호는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해 적응을 못했지만, 나는 문학에의 열정을 속에 감춘 채 닥친 현실에 묵묵히 순응하고 있는 것이 나와 김종호의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전시이고 코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했다. “좋소. 당신이 위대한 음악가라고 합시다. 그러나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잃어버린 무기를 어떻게 하든 구해 놓아야 하는 일이오. 나랑 같이 갑시다.” “어디로 갑니까?” “다른 부대에 가서 훔쳐야지, 별 도리가 없지 않소?”

“나는 훔치지 못합니다. 그건 도적질입니다.” “그럼 군사재판에 회부되겠소?” “무기를 도적맞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입장에 처할 것 아닙니까?” “당신 경우는 무기를 일부러 잃었거나 버린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는 밤에 자다가 도적을 당했으니 큰일은 없을 거요.” “그래도 나는 남의 것을 한 번도 훔쳐본 일이 없어요.” “그럼 내가 훔치지. 나는 예사로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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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강...대동강의 풍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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