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경제난 속에서도 핵보유국 향한 발걸음 지속하다

송광호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북녘땅의 빛과 그림자

송강호 북미특파원 | 기사입력 2023/01/12 [14:29]

1990년대부터 경제난 속에서도 핵보유국 향한 발걸음 지속하다

송광호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북녘땅의 빛과 그림자

송강호 북미특파원 | 입력 : 2023/01/12 [14:29]

북한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주민들의 궁핍한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다. 늘 식량이 부족했다. 김대중 정부가 준 5억 달러도 부족했나보다. 22년 전의 5억 달러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나 북한 사정이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막대한 돈이 진정 굶주리는 북 주민들보다 다른 용도로 쓰여 졌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당시의 불법자금이 북한 핵개발에 쓰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것 아닌가.

 

핵전문가 끌어들이는 노력 게을리 한 적 없어

핵보유국 인도,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와 접촉

캐나다의 핵 전문학자들에게 접근 기사도 접해

 

어쨌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에서 IMF 사태는 진정되는 국면을 맞았고, 북한은 일단 '고난의 행군'이 마감된 듯 했다. 북한은 큰 고비는 넘긴 모양새를 보였으나 외부로부터는 지속적인 식량 원조를 받았다.

그즈음 토론토에서 캐나다 곡물은행(Canadian Foodgrains Bank) 대표인 리처드 피(Richard Fee)씨를 만났다.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 세계봉사 및 개발부 책임자이기도 했다. 북한을 4차례 방문했다는 그는 서방국가에서 북의 핵무기 개발을 이유로 식량 원조를 중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피 대표는 북한 핵무기 개발 관련 건은 북측의 전쟁준비가 아닌 단지 미국 등지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타협수단인 것 같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그는 더구나 최근 세계 식량프로그램(World Food Program)측에서 지원예산을 삭감해 현재 북한 식량문제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염려했다.

피 대표는 북한 지방은 각 동네마다 새벽 6시 사이렌 소리에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 8시 이후에는 거리에 단 한 명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암흑도시로 변한다면서 북한 빌딩이나 가정에는 연료가 없어 추위에 떨며 살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이미 1990년대부터 경제난 속에서도 핵보유국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내가 볼 때 북한은 세계 어디서든 핵전문가를 끌어들이는 노력은 한시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 모스크바에서 특파원으로 지내던 시절 북한은 경제난에 봉착한 소련 핵과학자들을 월 2000달러의 보수를 주는 조건으로 데려간다는 러시아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또한 핵보유국인 인도, 그리고 인도와 대치하고 있는 핵보유국 파키스탄의 최고 핵물리학자와도 접촉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캐나다의 핵 관련 전문학자들에게 접근한다는 캐나다 최고보안기관 경고도 토론토 신문에서 접한 바 있다.

한국을 거쳐 토론토에 온 80대 탈북자 C씨는 난민신청으로 단시일에 영주권을 딴 인물로 자칭 김일성 측근이다. 그는 19947월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에서 사망했을 때도 함께 있었고, 수십 년간 늘 김일성 주석 옆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총대 끝에 핵이라는 구호로 늘 핵 보유만 꿈꾸어 왔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 핵과 관련한 것은 극비이기에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어쨌든 북한은 핵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삼아 오늘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그런 북한에게 무조건 핵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들이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토론토 임현수 목사 사례가 주는 뼈아픈 교훈

북 전폭적 지원불구 '반국가' 죄명으로 종신형

미주동포들의 헌신적인 북한 후원 결과는 '참담'

 

토톤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1955년생) 얘기를 잠깐 할까 한다. 임 목사는 북한을 돕던 중 무기실형을 받고 복역하다 31개월 만에 석방된 토론토 성직자이다. 그는 지난 1996-97년부터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당시 북에서 직접 캐나다 친북 대표로 임명한 70대 전순영(고 전충림씨 부인)을 통해서였다.



임 목사는 북한을 지속적으로 오갔다. 10여년 동안 150차례 이상 방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북미주 한인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대북 원조금으로 수천 톤의 식량, 수만 장의 이불, 겨울 옷, 안경 등 각종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게다가 북한에 라면공장, 가발공장, 국수공장, 컴퓨터 학원, 학교, 양로원, 농장 등을 세웠고, 어업 등 여러 부문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북한 경제특구인 함북 나선(나진·선봉) 지구와 인근 회령, 군포 등지에도 양로원 등 9개 복지건물들을 건립했다. 이 지역은 1998년 토론토 큰빛교회에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선교사로 정식 파송된 전종석 은퇴 장로(1925년생)가 주축이 됐다.

전 장로는 건물만 세운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며 매달 운영비, 인건비, 유지비 등으로 경비가 약 3000달러씩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전 장로는 10여년간 중국 연변 지역과 북한 특구인 나선지구 지원 작업에 여생의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연길시 연평 병원 명예원장을 비롯해 북한 나진시 양로원 명예원장, 나진 원봉/군포 유치원 및 탁아소 명예원장, 원정리 탁아소, 회령 문산리 양로원 및 수북유치원 명예원장 등을 맡고 있었다.

이희아 장애인 피아니스트 (네 손가락뿐인 제1급 선천성 장애소녀)가 기증한 3000달러 피아노도 그가 마련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현수 목사 수감 이후 북한 선교일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큰 지원사업은 함북 나선지구의 한 호수를 막아 농토로 만든 일이다. 이 사업은 미주교포들의 헌신적인 특별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일은 스폰서의 개발지원이 끊겨 중단되긴 했지만, 한 때 함북 주민들 사이에서 큰 화제거리였다고 한다. 당시 북미 교회 등지에서 임 목사를 통해 북녘 땅에 투입된 돈은 천문학적 액수였다.

그러나 헌신적인 미주동포들의 후원 결과는 참담했다. 임 목사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반()국가 정부전복음모라는 죄명으로 엮여 종신형 (무기노동교화 형)을 선고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캐나다 정부의 줄기찬 노력 끝에 만 27개월 만에 겨우 석방되지 않았던가.

나는 그를 만난 일도, 대화 한번 나눈 적도 없다. 다만 그가 설교를 잘한다는 소문을 간혹 들었다. 그는 교인 30여명 남짓한 개척교회 (한국 최초 동요작곡가 박재훈 목사가 설립한 장로교회)를 인계받아 맡은 지 불과 수년 만에 수천 명의 신자를 보유한 토론토 최대 교회로 우뚝 성장시킨 젊은 목사였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높았다.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렇다. 한국에서 약 20년 전에 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K후배가 이민 왔다. 그는 한 군데 교회를 정해서 다니려고 했으나 토론토에 한인교회 숫자가 워낙 많아 쉽게 결정을 못했다. 수개월간 매주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다 어느날 임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서 나에게 형님, 이제 교회결정을 했어요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을 정도다.

마침내 큰빛교회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 부인도 같은 교회를 다녔다. 총재 부인 역시 여러 교회를 옮겨 다니다가 목사 설교가 맘에 들었다고 했다.

솔직히 나에게는 임 목사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하려고 교회 사무실에 두 세 차례 메시지를 남겼으나 무시됐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라 그런지 만나기 위한 문턱이 꽤 높았다.

 

북에서 기독교인 가장 위험한 인물로 간주돼

미국·캐나다 등 자국민 북 억류시 적극적 대처

한국정부의 납북자 송환에 소극적 자세 아쉬워

 

하루는 K후배가 집에 들렀다. 그는 내가 방북할 때마다 찾아와 극구 말리곤 했다. 식구 같은 K는 내 방북이 늘 불안하고 맘에 걸렸던 것 같다.

괜찮아. 내 염려 말고 자네 교회 임 목사 걱정이나 해요. 나 같이 이름 없는 기자 나부랭이는 아무 것도 아니야. 임 목사는 지금 잘 나가는 것 같지만, 자칫 실수하면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어. 그때는 무슨 죄명인 줄 아나. 국가전복음모죄야.”

형님, 나는 임 목사님이 북한에 줄곧 다니는 것도 안 좋아해요. 하지만 무슨 국가전복음모죄인가요?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하지만 나중에 내 말이 들어맞았을 때 스스로 경악했다. 그전에 연길에 거주하는 조선족 L씨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L씨가 정색을 하고 일러준 말은 이랬다.

송 기자님, 북한 어느 고위급 인물이 은밀하게 일러준 얘기가 있어요. 제가 조선족 중국공민이라 가끔 솔직하게 털어놓고는 해요. 공화국(북한)에서 가장 위험인물이 기독교인이라는 거지요. 요놈(기독교인)들은 겉으론 선교사라는 탈을 쓰고 베풀어주는 척하면서 항상 우리가 망하기만 바라는 반동분자들로, 절대 요주의해야 할 놈들이라고 전합디다.”

북에 수년간 수십억 원 후원금을 내고 북한을 돕다가 순간적인 오해로 하루아침에 추방된 북미교포들을 알고 있다. 북한은 절대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평소 아무리 억만금을 갖다 줘도 한번 그들 체제를 흔든다는 의심을 받으면 끝장이다.

다른 얘기 하나를 덧붙인다. 평소 납득하지 못한 우리네 일 때문이다. 어느 국민이든, 또 죄가 있든 없든, ‘북한에 납북 또는 억류됐을 때 그 국민이 속한 해당 국가의 태도와 역할 얘기다. 예로 임현수 목사(캐나다 시민권자) 경우나 그전 미국 여기자들 억류 건, 일본 현지에서 납북된 젊은 일본여성에 대한 해당국의 대응자세다.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의 자국민 구출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구출해 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시도한다. 캐나다 연방수상이 앞장섰고, 미국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민간기까지 빌려 직접 평양까지 가서 두 여성 기자를 데려왔다. 일본 수상은 기회만 되면 북측이 납치한 여성의 귀환을 먼저 집요하게 요구하지 않았던가.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래 전 강릉 출발의 KAL기 납북건도 영구 미해결이다. 대한민국 정권이 그간 끈질긴 구출 노력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간 좋은 기회는 늘 있었다. 1993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송환, 또한 2000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조건 없이 송환시켰을 때다.

그때 교환조건을 내세웠어야 했다. 남북 정상회담 때도 납북된 한국 주민들의 송환문제를 국가차원에서 거론했는지 내 기억엔 없다. 이 점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무척 아쉬웠던 점이다.

 

 

북에서 계모임 활성화...경제난으로 용인돼

근로인민 생활상 애로 해결하고, 어려운 일

서로 돕는 미풍과 관련...날이 갈수록 보급

 

한편 1990년대 와서 북한 경제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자 북 주민들간 성행한 것이 각종 였다. 원래 주민들 간의 계모임은 종파분자들 모임으로 금지돼 왔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주민들의 자구책으로 이해해 북 당국에서 용인한 것 같았다.

사실 계모임은 한국이나 해외교포사회에서 대부분 여성들이 자주한다. 토론토 은퇴노인들도 여행 계 등 끼리끼리 친목계를 갖는다. 노인들은 캐나다 정부에서 매달 개인당 1500달러정도 연금(65세 이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중간에 깨지는 경우도 봤다. 처음부터 비양심적인 사람이 끼게 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북한 계를 잠깐 알아보자. 해외영접국의 책임지도원이 들려준 얘기다. 40대 책임지도안내원은 계모임은 근로인민들의 생활상 애로를 해결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돕는 미풍과 관련돼 있다면서 날이 갈수록 민간계가 보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 등 도시보다는 특히 시골 지방주민들이 많이 하고, 주로 여맹(여성동맹)조직에서 계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당국에서는 그간 계에 대한 시각을 긍정적으로, 주민들의 실생활을 돕는 미풍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계 규모는 작으면 4-5, 큰 규모는 20-30명 이상 되는 계도 있다. 종류도 다양하고 운영방식도 각기 다르다고 한다. 한국사회나 해외에선 계 책임자를 계주라고 부르나, 북에선 계장이나 계위원장’, 또는 계비서라고 한다. 계장은 계원들(북한명 계성원) 가운데 가장 신망 있는 사람을 선출한다.

또 계 종류는 항상 돈만을 갹출하는 현금계와 식량(, 옥수수 등)계 둘로 나눈다. 계 날짜는 보통 한 달이나 보름단위라 한다. 현금계는 주로 아파트나 직장 단위로 조직돼 있다. 식량계는 보통 식량 배급이 15일 간격으로 나오니, 일반적으로 보름 단위다.

아무튼 계는 자본주위 체재 아래에서 종종 발생하는 계 파동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인민들 생활에서 화목과 협조의 좋은 유산을 남겨놓은 민간끼리 모임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였다.

2001년 여름 강원도 장전항에 옥외광고탑이 생겼다. 장전항은 금강산 관광의 관문이다. 자본주의 상징인 이 광고탑은 월북한 고 최덕신(전 외무부장관 역임) 장남인 독일 거주 최건국 사장이 사업(독일 소재 한백상사)을 맡고 있었다.

최 사장에 따르면 장전항에 확보된 두 자리중 하나는 중국 IT산업사가 계약됐고, 나머지는 외국광고물보다 한국기업체 광고를 원한다고 했다. 고교 선배인 그는 그런데 한국 통일부와 현대그룹에서 한국기업체의 광고탑 설치를 반대하고 있어 참 힘드네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옥외 광고탑 설치는 금강산 입구인 온정리 등지에도 계획돼 있었으나 결국 성공치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평양 깊숙이 스며든 자본주의 상업화 물결

대형 자동차 광고탑에 국가복권까지 등장

늦은 밤 술 마시면 호텔 봉사료 20% 가산

 

자본주의의 상업화 물결은 평양에도 들이닥쳤다. 평소 금지됐던 자본주의 생활양식이라는 국가복권까지 나타났다. 추첨제 저금(무이자)을 통해 예금자들 중에서 당첨자를 추첨한다. 조선중앙 텔레비전 방송중계도 했다.

3-4년 뒤는 평양 한복판에 평화자동차 대형 광고탑이 세워졌다. 통일교(교주 문선명)가 주축이 된 이 광고탑은 북한의 유일한 자본주의식 선전구조물이 됐다.

 

광고탑 모델은 당시 휘파람 노래로 일약 유명 가수가 된 전혜영이다. 통일교에서 남북합영회사로 제작(조립생산)했다. 이 평화자동차는 2002년 남포(진남포)에 공장이 세워졌고, 첫 차 이름 역시 '휘파람'이라고 지었다.

평양 취재를 계속하면서 북한의 생활양식이 변하고 있음을 체험했다. 우선 공항의 검색이 강화되고, 내국인이 허가받지 않은 담배를 갖고 입국할 경우, 3배 관세를 부과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호텔에서는 밤 10시 이후 술을 마시는 경우 봉사료가 20% 가산됐고, 밤에 택시를 타면 요금을 3배 이상 받았다. 운전기사 (북에선 운전수라고 호칭) 맘대로 받는 것 같았다. 안내원에게 왜 이리 택시요금이 들쑥날쑥해요?”라고 물었더니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평양의 택시. 밤에는 요금을 3배 이상 받는 등 자본주의 상술을 뺨칠 정도다. 안내원은 박두선 애국차 봉사사업소라는 기업체에서 10여년간 관리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지금은 완전 달라졌다. 고려항공 소속을 포함해 5개 택시회사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꽤 많이 변화됐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북한사정이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전 일이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지난 19894월 북한당국은 주민들의 주거이전 자유를 전격적으로 허용해, 깜짝 놀랐다. 평양축전 3달 전이다. 그러나 웬걸, 한 달 만에 다시 종전대로 돌려놓아 또 한 번 놀랐다. 어떻게 외부에 공포했던 국가법을 하루아침에 다시 바꾸나.

특히 북한비자 발급은 늘 예측하기 힘들다. 몇 해 전 2월이다. 국제태권도 연맹(ITF) 리용선 총재가 토론토를 방문해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송 선생. 오는 가을 조국에서 열리는 제20회 세계 태권도대회에 오시지요?”라고 했다.

나는 그래요? 그럼 북한 취재를 한번 원하는 밴쿠버에 후배 부부가 있는데 함께 가도 되겠소?”라고 말했다.

, 그럼요. 우리 선전인데 누구든지 받아들입니다. 같이 오시라고요.”

나를 포함해 3명이 방북 신청을 하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년 만에 방북을 앞둔 2주 전이다. 갑자기 ITF 연맹본부(오스트리아)에서 이메일이 왔다. “송 선생 비자 발급은 불가 판정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른 2명 동행자는 비자 발급이 통과됐다고 연락이 왔다. 이미 나는 왕복항공편까지 끊은 상태였다. 과거에도 이런 똑같은 경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상했지만 어찌 하겠는가. 그런데 꼭 간다고 다짐했던 후배 부부도 안가겠다고 마음이 변했다. 김정은 정권 이후 첫 방북 취재였는데 그들이 좋은 기회를 포기한 게 너무 아쉽게 생각됐다.

 

송광호 북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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