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석상에서 지휘봉 들지 못해"...‘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 선생의 방북소감

송광호 북미특파원 | 기사입력 2023/02/13 [18:08]

"공식석상에서 지휘봉 들지 못해"...‘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 선생의 방북소감

송광호 북미특파원 | 입력 : 2023/02/13 [18:08]

토론토 내 집 근처 한 고급 콘도에 안병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작곡가) 선생부부가 살았다. 그들이 그곳에 거주한지 어언 30년이 다 됐다. 수년 전 갑자기 안 선생이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내 집과는 지척거리라 그와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래전 장애인 피아니스트 (일명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의 MBC 다큐멘터리 촬영을 내 집에서 시작됐다. 그날이 마침 희아 어머니 생일이었다. 그때 안병원 선생도 내게 들러 MBC 팀과 이희아 모녀를 만난 적이 있다.

 

작곡가 안병원 선생과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을 함께 언급하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방북문제에 관심이 있고, 재일동포 2세 리철우 작곡가(재일 조선예술연구소장)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리철우 작곡가는 2000년대 초반 이희아 양의 첫 일본공연을 성사시킨 적이 있다. 당시는 한때 내가 이희아 양의 해외연주를 위해 초청자를 수소문하던 시기였다. 안병원 선생의 방북초청 건 역시 재일동포 리철우 작곡가의 역할로 가능했다고 들었다.

 

그즈음 우연히 일본의 리철우 작곡가를 알게 됐다. 나는 그의 가족이 일본에서 잘 알려진 음악가 집안이라는 소문을 진작 듣고 있었다. 리철우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희아 양의 일본초청 공연을 의뢰했고, 그는 매년 이 장애인소녀의 일본 순회공연까지 성사시켰다.

 

이희아 양은 선천성 사지기형 1급 장애인이다. 그녀의 네 손가락뿐인 피아노 연주는 일본청중들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매년 일본에서 연주회를 지속적으로 갖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국위선양도 함께 떨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총련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에 속한 리철우는 지난1978년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전문음악인이다. 그의 뿌리는 경상도 대구이지만 무국적(無國籍)자다. 일본 조총련소속 사람들은 상당수가 일본 내 무국적자로 분류돼 있다.

 

리철우 작곡가는 안병원 선생의 방북문제뿐 아니라, 일찍이 가수 김연자의 평양공연도 성사시킨 인물이다. 일본 음악계의 최고 차세대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던 김홍재(54년생)는 그의 외 조카로, 나중 김홍재는 대한민국 국적이 됐다.

 

 서울 경복고 등 음악교사 역임

캐나다 이주 후 20014월 방북

남북이 애창하는우리의 소원작곡가로

유명세...해외곳곳에서 초청, 행사참여

 

안병원 선생은 해방 후 동요작곡가로 시작해 서울의 용산, 경복고교 음악교사 등을 지내 제자들이 많다. 남북한이 애창하는 우리의 소원작곡가로 유명세를 지닌 그는 70이 넘는 나이에도 해외곳곳에서 초청을 받고, 행사참여로 부부여행이 잦다.

 

 평양 봉수교회 뒷편에 두손 올려지휘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2009년에는 미 LA에 소재한 미주동포후원재단에서 제4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미주재단은 매년 한인지도자 육성과 한인사회 바로세우기를 목적으로 설립된 권위 있는 사회단체로 상금이 1만 달러다.

 

그 이전시기부터 안병원 작곡가는 평소 방북을 통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를 지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지난 2001년이다.

 

매년 4월 열리는 평양 봄 축전 예술제에 북한 문화성에서 안병원 선생부부를 초청한 것이다.

바로 직전 해 나는 일본 오사카의 남북한 음악회에서 안병원 작곡가에 대한 북한초청이 거론되고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 초청 건이 순조롭게 풀려 그가 소망하던 북한방문이 마침내 실현케 된 것이다.

 

방북을 앞두고 그는 마치 첫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무척 들떠 있었다. “내가 말이요. 북한 4월 봄 축전 공식행사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를 지휘하게 됐어요. 어때요?” “,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방북이 성사돼 뜻을 이루게 됐군요.”

 

그럼. 그래도 아직 북한에 갈 수 없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아마 북한에 가서도 제대로 관광도 할 수 없는 심정이 될 것 같아.” “아무튼 잘됐어요. 평양은 누구든 한 번은 다녀와야 소통과 이해가 쉬워요.”라고 답했다. 안 선생은 나는 무엇보다 이번 방북기회에 북한 음악수준을 파악하려고 해.” “. 좋지요. 그런데 초청경비는 어디서 대나요?” “북한에서 항공료와 호텔 등 모든 경비 일체를 부담한다고 들었는데.”라고 말했다.

아마 이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북한에서는 어느 누구든 초청 항공료를 대준 전례가 없다. 아마 주선을 한 일본()총련 측에서 후원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점은 중요치 않다.

 

안 선생부부는 북한에서 1주일 체류한 후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를 만나 모처럼 북한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북한 공식석상에서 지휘봉을 들지 못했다. 소개도 안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 선생은 별로 실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체로 방북 후의 실지 경험에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의 방북 소감을 간략히 전한다.

 

 봄 축전 공식행사에서 지휘봉 들지 못해

소개조차 하지 않아...상석 만들어주고 대우

극진했으나 목적인 지휘 못하게 돼 섭섭

 

이번 첫 방북에서 인상적인 것은 4월 봄 축전이었다. 이 기간 중에는 주민들이 모두 꽃과 노래에 밀접해 있는 분위기의 생활이었다. 무슨 음악이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양으로 일관됐다. 노래는 첫째, 둘째가 모두 김일성부자를 찬양하는 노래이고, 세 번째가 통일노래였다.

 

 평양 길거리에서 지휘하는 안병원 작곡가.


그들의 통일 열기는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어디를 가나 김일성 부자와 통일주제만이 주민 일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안내원은 작곡가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해줬다. 숙소도 고려호텔 큰 응접실이 달린 좋은 방을 배정해 주었다. 어디든지 사진을 맘대로 찍게 했으며, 행사일정에 맞추지 않고 내 개인적으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배려를 해줬다.

안내원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내가 평양에 온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함경도에 군인들을 위로하러 갔다고 전했다. 내가 만난 고위인사는 홍성남 총리와 강능수 문화상(장관), 송석환 부부장(차관)등과 인사했다. 그들과는 순전히 음악과 예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북한에서 장관 등 고위간부들은 예술가 출신이 월등히 많다고 한다. 강 문화상은 문학평론가출신이며, 송부부장도 피바다가극단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고 들었다.

 

어쩐 셈인지 나는 봄 축전 공식행사에서 지휘봉을 들지 못했다. 내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좌석은 주석단이라는 상석을 만들어주고 (부인은 하단에 안내원과 함께 자리 잡음), 대우도 극진했으나 원래 목적인 지휘를 못하게 돼 섭섭했다.

 

북한 측은 지휘봉을 못 잡게 한데 대해 미안하다며 내년 행사에 다시 오라고 초청을 했다. 다른 새 통일 노래 작곡을 요청하기도 했다.

 

행사장 밖의 주민들우리의 소원노래

즉석에서 소개하며 지휘하게 하고 횐영

박수 치고 환호성을 올리며 인사 했다

 

대신 안내원은 행사장 밖의 평양소년궁전이나 주체사상탑 앞거리와 봉수교회 등 여러 대중들이 있는 장소를 지날 때마다 나를 소개해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주민들은우리의 소원노래를 부르고 즉석에서 나를 지휘하게 했다. 그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너무 좋은 노래를 만드셨습니다,” “심금을 울린 노래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등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소원노래를 <민족의 노래>라고 표현했다.그들은 통일노래를 작곡으로 대변해줘 고맙다고 계속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합창이 끝나고도 흩어지지 않고, 내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계속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하철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반기는 시민에게 노래를 아느냐고 했더니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이런 일들이 두세 번 되풀이 됐다. 가끔 사인(sign)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 물어보니, 조총련 계 일본교포였다.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으로 인해 축전행사장에서 지휘를 못 한 섭섭함이 봄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나는 봄 축전에 참여한 다른 단체일행과는 달리 따로 움직였다. 짧은 체류기간이라 금강산, 백두산, 묘향산 등은 가지 못했다. 특히 금강산은 당시 정주영 씨가 기득권을 갖고 있어 안 된다고 말했다.

 

개성(판문점)에 갔을 때였다. 인민군이 나를 불러 섬뜩했다. 알고 보니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한다. 또 일요일에 나는 천주교신자라 평양 장충성당에 갔는데 신부가 없어, 다시 봉수교회로 가서 예배를 보며 통일노래를 불렀다. 윤이상 음악당(연구소) 등도 참관했다.

 

북한에 1주일 머무는 동안은 축전 특별기간이라 그런지 전력사정이 아주 좋았다. 일체 절전이 없었고, 기둥마다 네온과 거리에는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15일 태양절(김일성 생일)에는 하늘에 불꽃놀이로 화려하게 수놓았다. 어느 곳이든 평양전체가 들떠 있었다.

명절이라 그런지 여자들이 입은 한복도 유치하지 않고 좋았다. 주변과 길거리에는 수령복이라는 플래카드 간판이 눈에 띠었다. 내 아내가 무슨 양복점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으니, 안내원이 웃으며 그건 옷감이 아니고 우리 인민들이 수령님 복을 많이 받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줬다.

 

봄 축전이 끝나기 전에 먼저 평양을 떠났다. 평양체류 시 나는 원래 가리는 음식이 많아 처음에는 식사걱정을 했는데, 입맛에 다 맞아 다행이었다. 토론토에 돌아와 몇몇 교포에게 무심히 이런 얘기를 전하니 벌써 북한에 물드셨군요.”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평양공항에 첫발을 디뎠을 때다. 나를 맞은 문화성소속 김영신 심의위원장의 첫 마디가 남조선에서 오신 것 같군요.”라고 말해, 긴장되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를 만나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생각은 캐나다 귀국 후에도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남과 북의 깊은 골과 장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서글픈 생각이 든다.“

 

 송광호 북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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