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 봉사활동은 사회를 밝히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지혜”

[인터뷰] 탈북민단체 ‘남북우정사랑봉사회’ 최서정 회장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3/04/26 [14:52]

“탈북민들 봉사활동은 사회를 밝히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지혜”

[인터뷰] 탈북민단체 ‘남북우정사랑봉사회’ 최서정 회장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3/04/26 [14:52]

지난 20198월 탈북민사회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서울시 봉천동 임대아파트서 살던 탈북여성 한성옥(42)씨 모자(母子)가 아사한지 두 달 넘어 발견되었다. 굶주림을 피해 온 탈북민이 서울에서 굶어죽었으니 다소 아이러니했다.

202210월에는 서울시 신정동의 한 임대APT서 탈북여성 김정혜(49) 씨가 겨울옷을 입은 채 백골상태로 발견된 사건이 생겨났다. 최소 1년 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비극은 탈북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자아냈다.

위의 사례를 보면 정확한 사인은 아니겠지만 망자에게 외로움, 고독, 우울증 같은 것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충분히 든다. 북한에서 그리고 중국과 탈북과정에 겪은 고초로 알게 모르게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탈북민들이 많다.

과반이 독거생활자인 탈북민 사회서는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탈북민들 자체로 협의하고 대책을 세우며 극복하자는 의견도 분분하다.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서 탈북민단체인 남북우정사랑봉사회최서정 회장을 만났다.

 

- 과거 있은 탈북민 아사(고독사) 어떻게 보나.

내가 남한에 온지 3년 만에 서울에서 발생한 한성옥 모자(母子) 아사사건이다. 당시 6살 난 아들과 함께 죽음으로 발견된 그 비극을 보면서 마음이 찢기도록 아팠다. 나도 하나뿐인 아들을 북한에서 죽임 당한 엄마이다. 어떤 이유든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 어머니의 고통은 말로 다 형용 못한다.

작년에 해골상태로 발견된 김정혜 씨의 고독사는 또 한 번 우리 탈북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회적 약자인 탈북민 그것도 여성들 속에서 자주 발생하는 무연고 고독사는 정말 우리가 정신 바싹 차려 살피고 꼭 피해야할 숙명이다.

- 남북우정사랑봉사회를 소개해 달라.

지난 202151일에 설립했다. 이름 그대로 남한사람과 탈북민이 하나가 되어 함께 어울려 봉사활동과 아름다운 선행을 많이 하자고 조직된 단체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받은 사랑을 봉사로 갚자는 취지도 있다.

탈북민들의 자발적 단체생활 참여가 생활문화를 바꾸며 나아가 긍정적인 마음과 활기찬 모습으로 사회에 정착하면 그것도 분명히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까지 담아 설립한 우리 단체이다.

단체의 특성이라면 대구에는 현재 800여 명의 탈북민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는 더 많았는데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많이 나갔다. 대구에는 몇 개의 탈북민단체가 있다. 보통 10~15명 회원들이 홮동하고 있다. 우리 단체는 17명으로 시작했고 현재 등록회원은 100여 명, 회비납부 회원이 60여 명이다. 단체회원은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계속 늘어나고 있다. 올해 안에 회비납부 회원 100명을 돌파할 계획이다.

 

남북우정사랑봉사회는 20215월 설립

남북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봉사활동과

아름다운 선행 많이 하자고 조직된 단체

탈북민들 한국에서 받은 고마움 봉사로

갚자는 취지도 있어...현재 회원 100여명

 

- 그동안 어떤 봉사활동을 했는가.

단체 설립 해부터 매년 한 차례씩 성서종합노인복지관에 어르신들을 위한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 비록 큰 금액은 아니지만 우리단체 회원들의 십시일반 성의로 모여진 후원금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할 일 중에 하나이다.

작년에 재난, 화재, 사고 등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했다. 2차례에 걸쳐 옷, 생활용품, 식품 등 500만원 상당의 후원물자를 지원하였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낳은 아름다운 소행이다.

 

 

- 또 다른 봉사가 있었다면.

 

 

정기적인 조리봉사와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한다. 복지관의 노인들 중에는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 어르신도 다소 있다. 무엇보다 같은 고향사람들인 우리 탈북민들이 해주는 음식을 맛보고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다. 고향이야기를 해주면 웃기도 울기도 하는 어르신들이니 우리도 많은 인생 공부를 하는 셈이다.

-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는가.

올해는 무엇보다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어르신과 실향민어르신들을 찾아가서 빨래, 집안청소, 목욕, 머리염색, 말동무 등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그리고 봄,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서 어르신들에게 효도관광 해드리려고 계획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성서종합노인복지관에서 매월 2회 조리 및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꾸준히 진행하려고 한다. 이 지면을 빌어 회원님들의 지속적인 참여를 부탁드린다. 사실 말해서 복지관이나 교회에서 어르신을 상대로 하는 봉사활동은 매우 의미가 깊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심리안정과 정착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매년 성서종합노인복지관에 성금을 기부

회원들 십시일반 성의로 모여진 후원금

재난, 화재, 사고 등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 찾아가 위로...고향어르신들 우리가

해주는 음식맛보고 눈물 흘리는 분도 있어

고향이야기 해주면서 우리도 인생 공부 해

 

- 본인의 단체 운영관은 뭔가.

누군가 나에게 단체생활과 회사생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고 물으면 회사생활이 우선이다!’고 답한다. 우리는 남한에 잘 살자고 왔다. 그래야만이 고향에 남겨진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다. 잘 살려면 돈 버는 회사생활이 우선이다.

그리고 단체생활도 중요하다. 특히 우리 탈북민들에게 흔한 우울증, 고독, 외로움 등을 예방하는데 단체생활이 적지 않게 도움이 된다. 아무리 일확천금도 죽으면 소용없다. 결국은 일도 봉사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598월 양강도 백암군에서 태어났다. 백두산만큼이나 높은 고산지대이다. 형제는 3남매 중 둘째, 아버지는 가구공장 초급일군,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197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하여 8년간 군사복무를 하였다. 제대 후 배치 받은 곳은 평안남도 평원군 행정위원회 산하 ‘8·3가내협동조합이다.

- ‘8·3가내협동조합은 어떤 기관인가.

1980년대 중반 김정일이 평양시 경공업제품 전시장을 현지지도하고 인민들의 기호에 맞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가내반(인민반)에서 많이 생산하여 생활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생긴 하나의 사회적 노동운동이다.

참고로 1984년 봄, 김일성이 약 50일간 소련 및 구라파 사회주의나라들을 열차로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가 외국에는 농민시장도 있던데 평양에도 농민시장을 열어 인민들의 식생활, 문화생활을 적극 개선하라고 교시하였다.

- 주로 어떤 제품을 만드나.

모자, 앞치마, 장갑, 장판지, 방석, 재떨이, 부채 등 주민들의 일반 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생활용품이다. 가지 수는 무한대이다. 즉 국가공장에서 생산 못하는 소소한 생필품을 가내반(인민반) 주부들이 모여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도 매달, 분기, 연간계획이 세워지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의 피타는 노력도 대단하다. 당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하는 일이니 대충하였다가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 맡았던 직무는 무엇이었나.

평원군 8·3가내협동조합 OO지구 반장을 맡았다. 지구 가내반원 700~800명을 통솔하는 자리이다. 가내반원들은 연로보장자(정년퇴임자), 사회보장자(질병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자), 가정부양(주부)들로 구성이 되었다. 쉽게 생각하면 직장인과 학생을 제외하고 사회에서 무직 중인 모든 사람이 소속된 단체라고 보면 된다.

 

’59년 양강도 백암군서 출생...고등학교

졸업 후 인민군에 입대 8년간 군사복무

제대하고 배치 받은 곳 ‘8·3가내협동조합

생산물품은 모자, 앞치마, 장판지, 방석 등

 

가지 수는 무한대...국가공장서 생산 못하는

소소한 생필품을 가내반 주부들 모여 생산

직장인과 학생을 제외하고 사회에서 무직인

모든 사람이 소속된 단체라고 보면 될 듯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소비품생산미달, 노력동원 미달 등으로 ‘10일 영창처벌을 받았다. 10일간 안전부 구류장에 들어가 주는 밥(감자, 옥수수 끼니 당 100그램)을 먹으며 꼼짝없이 앉아서 받는 처벌이다. 주로 경제일군들이 자주 받는 사회적 처벌이다.

10년간 세 차례 ‘10일 영창처벌을 받았다. 처음에는 죄를 짓지 말고 일을 잘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부터는 이게 왜 죄가 되지? 배고픔에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 서서히 노동당의 ‘8·3인민소비품제도를 의심했다. 결국은 이 운동도 인민들 잡생각 못하게 들볶는 행위임을 알았다.

-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남편은 결혼 후 3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년 남짓 아들 하나를 키우며 혼자 살았다. 아들의 결혼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201010월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탈북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아들은 중국 공안에 단속이 되어 북송되었다. 이후 3년간 집결소(감옥) 생활을 마치고 다시 나를 찾아 중국으로 탈북 하던 중 인민군 국경경비대에 걸려 4명의 군인에게 매를 맞아 창자가 밖으로 튀어나와 죽었다.

- 그 소식을 중국에서 들었는가.

그렇다. 이후 나도 모르게 사람이 무섭고 세상이 싫어지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트라우마(정신적 고통)로 세상이 싫었다. 우울증, 외로움이 심각했다. 그러던 중 2014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중국 조선족으로 가구공장 사장이었다. 이 분이 실어증(말 안하는 병)에 걸린 나를 위해 사업도 접고 공기 좋은 시골로 함께 들어갔다. 좋다는 한방치료를 다 받으면서 1년이 지나서야 다시 원상대로 회복이 되었다.

 

결혼 3년 뒤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

20년 남짓 아들 하나 키우며 혼자 살아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201010월 아들과 압록강을 넘어 탈북

 

하나원에서 요양보호사 공부...중국에서

겪었던 우울증, 실어증 등으로 고생한

아픔이 있어 이 분야는 공부 할 욕심내

지금까지 요양보호사 일도 겸하고 있어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병세가 호전되자 남편이 한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 보내주었다. 탈북비용으로 아낌없이 쓰라고, 꼭 북송되지 말고 살아서 한국에 오라면서 말이다. 중국공안은 단속된 범인에게서 돈만 받으면 무슨 일이든 눈감아 준다. 그래서 배짱 두둑하게 탈중 길에 올랐다. 심양- 베트남-라오스-태국을 거쳐 20162월 한국에 왔다.

- 사회 나와서 어떤 일을 하였나.

하나원에서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였다. 내가 중국에서 겪었던 우울증, 실어증 등으로 고생한 아픔이 있기에 이 분야만큼은 잘 알고 싶었다. 사회로 나와서 두 번째 시험 만에 합격을 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요양보호사 일을 겸하고 있다.

철저히 개인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생활은 우리 탈북민들에게 있어서 쉽게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지게 만든다. 자칫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사회활동 및 신앙생활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탈북민 가정은 대부분이 1인 세대이다. 그 중에 적지 않게 집에서 조용히 살며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는 탈북어르신들도 제법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본인의 정신건강에 매우 해로운 것이다. ‘누죽걸산이라는 말도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다. 가능하면 단체에 나와서 고향사람들과 좋든 싫든 어울리며 자원봉사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해먹으면서 즐겁게 살아야 한다.

- 고마운 분은 누구인가.

생명의 은인 남편이다. 그이는 중국에서 북송불안감에 떠는 여러 탈북민을 알게 모르게 도왔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뜨겁다. 단체운영에 많이 드는 돈이다. 남편의 경제적 도움이 없으면 이런 사회활동도 불가능 했으리라 본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남편이 최고 중에 최고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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