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천국에 민주화의 상징 4·19기념관 없다는 것 부끄러운 일”[인터뷰] 4·1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조형용 상임고문근대정치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재국가 북한이다. 형식상 사회주의국가이나 실제로는 한 가문의 자손이 통치를 이어가는 왕조국가다. 1948년에 수립되어 장장 75년간 김일성 자손이 ‘조선노동당’ 정권을 잡아 존재하고 있다. 수령을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무서운 사회 평양서 살던 기자는 서울에 와서 자유민주주의에 감탄했다. 대통령을 국민의 비밀투표 선거로 뽑는 것! 그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해도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 것이 꿈만 같았다. 이런 자유에 청년들의 붉은 피가 바쳐졌음을 영상과 활자기록에서 알았다. 소중한 자유민주주의에 기여한 분들은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근 경기도 안산시에서 4·1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조형용 상임고문을 만났다.
지난 2015년 12월에 창립된 시민단체이다. 4·19혁명정신의 근간인 자유, 민주, 정의정신을 갖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향에서 활동하고 있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 사회정화운동, 남북관계문제, 시민의식개혁 및 통일세미나도 진행한다. 현재 조인형 회장이 본 단체를 이끌고 있으며 사무실은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에 있다. - 4·19혁명인데 왜 ‘4·18의거’라 하는가. 1960년 3·15부정선거(제4대 대통령선거, 제5대 부통령선거)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와 서울에도 상륙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제1공화국을 종식시킨 4·19혁명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 4·19혁명의 도화선이 하루 전날인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작했다고 하여 ‘4·18의거’라고도 한다. 고려대학교 출신 우리 세대 사람들의 소박한 프라이드(자존심, 긍지감)이기도 하다. - 5·18민주화운동은 법정기념일이다.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전라남도 광주 일원서 신군부 집권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이다. 이때도 주동세력이 청년학생들이었다. 1997년 5월에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4월 19일은 법정기념일이 아니다. 엄연히 5·18보다 거의 20년 전에 먼저 있었던 청년학생들의 죽음까지 각오한 필사의 민주정신으로 거행된 똑같은 민주화운동인데 말이다. 다소 안타깝게 생각한다. 또 아쉬운 점은 현재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기념관이 많다.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기념관까지 하면 기념관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사하게라도 4·19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고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에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4·19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점점 잊혀가는 우리들의 4·19정신이 어떻게든 젊은 세대가 이어가야 할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처럼 우리도 민주화기념관이 꼭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이 더 한층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5년 12월에 창립된 시민단체 4·19혁명정신의 근간인 자유, 민주, 정의정신을 구현하는 방향에서 활동
4·19는 법정기념일이 아닌 것 아쉬워 5·18보다 20년 전에 먼저 있었던 투쟁 청년학생들의 죽음까지 각오한 필사의 민주정신으로 거행된 민주화운동 확신
- 통일문제에 어떤 고견이 있는지 듣고 싶다. 남한의 민간단체들이 4·18민주의거정신을 북한에 전파해야 한다. 마치 남한서 4·19를 발단으로 민주화운동서막이 열렸듯이 북한서 청년들이 깨어나 독재정권에 항거해야 한다. 그들 손으로 독재정권을 끌어내어야 통일이 가능하다. 또한 2천만 동포를 따뜻이 품는 남한의 국민들이 되어야 통일의 물꼬를 틀수 있다. - 남북한 정권 특수성도 있지 않는가. 그게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북한은 3대째 똑같은 정권이니 대남정책이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남한이다. 남한은 5년에 한 번씩 무조건 정권이 바뀐다. 같은 보수, 같은 진보정권이라도 임기 동안의 대북정책은 분명 다르다. 통일부를 봐도 그렇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교수가 어느 날 장관이 되어 1~2년간 일하다가면 끝이다. 교수보다는 정치인, 정치인보다는 전문가 출신의 행정 관료가 더 일을 잘한다. 정치권에서 통일 분야는 여야가 협치해야 한다. - 한반도 주변국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작년에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전쟁을 계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안보문제는 다시 냉전이전 시대로 돌아갔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소리가 우연치 않을 정도이다. 한반도가 세계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로 미묘한 위치인 것은 사실이다. 안보만큼은 한미일이 공조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도 한반도 평화유지의 해법이다.
남한 민간단체들 4·18민주의거정신 북한에 전파해야...4·19를 발단으로 민주화운동서막이 열렸듯이 북한서 청년들 깨어나 독재정권에 항거해야
- 탈북민과 김정은의 딸에 대한 생각은. 딸 자랑하는 아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문제는 미성년자인 어린 딸(10살로 추정)을 미사일발사장, 미사일부품공장 등에 함께 모습을 나타내는 북한의 김정은이라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탈북민은 거두절미하고 통일의 귀중한 보배이다. 군대가 전쟁서 적을 이기려면 적을 잘 알아야 한다. 통일은 남한이 주체가 되어야 하며 북한을 잘 아는 존재는 탈북민이다. 이들을 잘 훈련시키는 것도 분명 통일준비다. 통일은 누구도 모른다. 100년 뒤에 올지? 아니면 내일 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통일이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39년 10월 25일, 함경남도 함주군 태조면에서 출생했다. 형제는 7남매 중에 넷째. 할아버지, 부모형제, 고모 등 13명이 한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인민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영하여 집으로 와서 숨어 지냈다. 삼촌들은 나이가 어렸기에 다행히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다. 팔에 ‘완장’을 찬 인민위원장, 공청(청년)위원장, 여맹위원장 등이 눈을 부릅뜨고 여기 저기 숨어있는 젊은이들을 찾아다녔다. - 피난길에 오르게 된 경위는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1950년 10월 평양을 해방하고 기세등등하여 북진으로 압록강 가까이 갔다. 거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허나 뜻밖에도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군은 아쉽게도 후퇴 길에 올랐다. 전쟁소식에 아주 민감하셨던 아버지가 사주팔자를 보면서 짧으면 일주일, 길어야 3개월 안에 재북진이 있다며 나와 형님 2명을 앞세우고 피난길에 올랐다. 4명이다. 할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은 3개월만 기다리라며 남겨두었다.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닌 그 순간이 어제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1939년 함경남도 함주군 태조면서 출생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군은 후퇴 길에 올라...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형님과 함께 피난...가족들과 부둥켜안고 울던 그 순간이 어제처럼 기억에 생생해
-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함주를 벗어나 배를 타고 남하하기 위해 흥남으로 이동했다. 흥남부두에 쌀이 3~4cm 쭉 깔렸다. 버리는 것이다. 그대로 창고에 놔두면 중공군과 인민군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미군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미군들의 안 좋은 모습도 있었다. 주로 흑인군인들이 마을을 다니며 여자들을 찾아 겁탈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피해 여자들은 남장을 하고 다닐 정도였다. 전쟁은 그렇게 황당하고 기이한 현상을 많이 만드는 것을 알았다. - 어떻게 남하하게 되었는가. 1950년 10월 24일, 성탄절 전날 흥남항에 정박한 미군화물선에 오르라는 지시가 내렸다. 미군물자를 날라주는 사람을 우선으로 승선시켰다. 아버지와 형님들 나까지 포함되었다. 미군은 피란민을 태우기 위해 실어야할 일부 군수물자도 포기했다. 배는 5일을 항해하여 12월 29일 부산을 거쳐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1957년 부산기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3년 ROTC(대학졸업생이 군 장교로 입대하는 제도) 1기로 임관 동시에 대학을 졸업했다. 국군 11사단 20연대 소대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후 안동에 있는 30사단 중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장군전속부관 시험을 봐서 합격하였다. 군대 안에서 학사장교의 설움, 괄시를 받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쇄신과 개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며 그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포천에 있는 6군단 작전처 교육장교 근무를 끝으로 전역하였다. 1968년이다. -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니 외국무역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전역을 하고, 이후 서울 구로에 있는 대협무역회사에 취업했다. 일본, 미국 등 4개국과 무역을 하는 회사였고 무역담당자로 근무했다. 참고로 1970년 전후로 무역을 하려면 ‘무역사자격증’을 시험 봐서 취득했어야 했다. 당시는 무역허가도 정부가 까다롭게 했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무역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며 자격증제도가 없어졌다. 대협에서 2년간 근무하고 이후 삼정통상(모피회사)으로 이직했다. 이때부터 해외근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10년간 해외에서 주로 유럽 국가들에 상주한 회사 무역담당자, 전무, 부사장 등으로 근무했다. 현지에 체류할 때는 보통 4성 호텔 이상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회사의 명예, 자존심과도 다소 연관되었기에 그렇다.
고려대에 입학...1963년 ROTC 1기 임관 대학 졸업 후 국군 11사단 20연대 배치 포천 6군단 작전처 교육장교 끝으로 전역
마을동구 밖까지 나오며 남으로 내려가 끼니 거르지 말고 살아야 한다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남아있어
- 고향생각이 많이 날 때는 언제인가. 크리스마스이브(성탄절 전날) 때다. 마을동구 밖까지 나오며 남으로 내려가서 끼니를 거르지 말고 꼭 살아야 한다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새록새록 추억에 떠오르는 고향이다. 모름지기 할아버지와 어머니, 고모부 등 우리 가족은 몽땅 인민군대에 의해 총살되었을 것이다. 태극기, 라디오, 반공책자 등이 가택에서 나왔으니 그게 용서가 되겠는가. - 실향민의 아픔이 비극이다. 아버지도 형님 두 분도 모두 하늘나라에 가셨다. 나 혼자 남았다. 평생토록 고향 땅 한 번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우리 4부자. 나 또한 언제인가 내 고향으로 가보는 통일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이 민족의 안타까운 마음을 하느님께서 굽어 보살펴 주시기 바란다. 남한에 내려와서부터 지금까지 성당에 다니는 천주교 신자다. 어쩌면 10대 시절에 타향에 와서 지금까지 살았던 강인한 정신은 종교에서 얻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고마운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다. 내가 장교 때 휴가를 나가서 OO국민(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소개로 만났다. 그 교감 선생님도 이북에서 내려온 분이시다. 당시 그 학교 양호(보건)선생이었다. 아내는 과거 파견 서독간호사로 근무했다. 나를 만나 결혼, 이후 지방보건소에서 일하였고 정년퇴직을 했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 그 고운 얼굴에 스며진 사랑은 내가 말을 안 해도 늘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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