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물리적인 것보다 사람 대 사람과의 통일이 중요”

[인터뷰] 대한예수교장로회 ‘하나비전교회’ 송은혜 담임목사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3/08/23 [11:27]

“남과 북의 물리적인 것보다 사람 대 사람과의 통일이 중요”

[인터뷰] 대한예수교장로회 ‘하나비전교회’ 송은혜 담임목사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3/08/23 [11:27]

기자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종교단체의 주최로 열리는 탈북민 조찬기도회에 참석한지 20년이 지나갔다.

남한사람과 탈북민들이 함께 하는 조찬기도회에 매회 평균 100명 안팎이 모인다. 조찬기도회모임에서 10년 째 통성기도를 인솔하는 탈북여성 목사님이 있다. 오전 7시에 시작하는 탈북민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려고 새벽 5시 경기도 평택의 자택을 나선다. 탈북민교회인 하나비전교회를 설립하고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인들과 함께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얼마 전 서울 강서구에서 송은혜 대한예수교장로회 하나비전교회담임목사를 만났다.

 

- 교회는 언제 설립하였는가.

지난 20109월에 설립하였다. 현재 출석인원은 25명이다. 아이들까지 합치면 40여 명의 한 가족과 같은 단란한 교회식구이다. 80%는 탈북민성도, 20%는 남한성도다. 가장 이상적인 퍼센트는 탈북민 절반, 남한사람 절반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더라. 탈북민들은 탈북민교회에 출석함을 더 편안해한다.

- 탈북민교회 출석 남한성도가 적은 이유는.

남한성도들이 탈북민교회에 와서 군림하고 지도하려는 성향도 분명 있다. 이를테면 탈북민들은 남한에 왔으니 우리한데 많이 배워야 한다는 눈빛이고 자세이다. 탈북민들이 겉으로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 우리를 북한에서 왔기에 이렇게 무시하는가? 남한사람들은 잘나면 얼마나 잘 났다고?” 하는 마음이다. 탈북민과 함께 어울려서 종교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이 남한성도들에게 부족한 것 같다. 사견이다.

- 탈북민들의 종교 생활을 어떻게 보나.

남한에서 탈북민들의 빠른 정착생활의 지름길이 신앙생활이라고 본다. 일단 교회를 안 다니는 탈북민들은 주일 놀러 다니기 바쁘다. 물론 자기 돈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그것이 정착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

교회에서 지난 한 주간의 생활을 돌이켜 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무엇보다 본인들 건강정신에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뜨겁게 드리는 신자들을 제일로 사랑하신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가 더 있는 것도 현실이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

 

20109월 설립...현재 출석인원 40

가족과 같은 교회식구로 80% 탈북민

20%의 남한성도들 탈북민교회에 와서

군림하고 지도하려는 성향 분명 있어

탈북민들의 빠른 정착생활의 지름길이

신앙생활...탈북민교회에 출석 더 원해

 

- 매월 기도 인도하는 한정협조찬기도회는.

지난 2001년부터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에 열리는 한정협(한국기독교탈북민정착지원협의회) 조찬기도회이다. 대략 참여자 90%가 탈북민이고 10%가 남한사람이다. 북한선교에 사명감이 높은 군()출신 기독교인들이 기도 속에 만든 탈북민 신앙교육 및 정착지원 단체다.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온 탈북민들의 심리적 아픔과 슬픔을 따뜻이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돕는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

 

 

 송은혜 목사



 - 대안학교도 운영하고 있던데.

탈북여성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아이를 맡겨 둘만한 곳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중국에서 태어났기에 한국말을 모른다. 이런 애들을 전문으로 맡아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2011성비전학교를 설립했다.

학생은 평균 20명 안팎이다. 아이들을 우리 학교에 맡기고 일터에 나가서 열심히 정착하는 탈북여성과 가족들을 보면 일하는 보람을 느낀다.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에 조찬기도회 가져

참여자 90%가 탈북민이고 10%가 남한사람

북한선교에 사명감 높은 군 출신 기독인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온 이들의 심리적인

아픔과 슬픔을 따뜻이 위로하고 그들 삶을

물질적으로 돕는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어

 

- 고향이 어디인가.

196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4남매의 맏이. 부모님은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노동자였다. 할아버지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탈북)하였기에 월남자가족꼬리를 달고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산경제대학 혹은 청진의학대학을 가려고 했으나 결국 토대’(할아버지 이력, 출신성분)가 나빠서 부결되고 말았다.

1988년 청진고등농업전문학교를 졸업, 청진1사범대학 교원양성반(6개월)을 다녔다. 이후 청진고등농업전문학교 수의학과 실습지도교원이 되었다.

-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당시 청진고등농업전문학교에는 45명의 교원(교수)이 있었다. 고난의 행군시기(1990년대 중후반) 교원들의 출석률이 크게 하락되었다. 일주일에 2~3일 출근하면 잘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결근했는데 주로 생계를 위한 장사를 했다.

학교 당국은 국가가 식량배급을 못주니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이때 결근 교원들을 대신하여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집짐승진단학, 해부심리학, 집짐승해부학 등을 가르쳤다. 실기 과목에서는 쥐, 토끼 등을 해부하는 교육을 실행하였다. 다행히 나는 예전에 벌어놓은 돈이 있어 한동안 어렵지 않게 교원 생활을 했다.

- 이후 어떤 경력이 있는가.

무엇보다 국가에서 식량배급을 안주는 것이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고의 가장 큰 이유였다. 교원들 절반 이상이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나도 더는 교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직했다. 이후 조선인민군 산하 OO수산사업소에 취업하였다. 일명 외화벌이사업소다. 당시 웬만한 외화벌이 회사는 전부 인민군에 소속되었다. 그 덕분에 그나마도 다행히 밥은 먹으며 살았다.

 

69년 함북 청진에서 출생...부모님은 노동자

할아버지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기에

월남자가족꼬리표를 달고 어렵게 살아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원산경제대학 혹은

청진의대에 가려 했으나토대가 나빠 부결

 

- 탈북 경위를 말해 달라.

 

1997년 여름, 두 여동생이 파라티푸스에 걸려 고생을 했다. 돈이 있어도 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북한산 약은 원래부터 없었고 예전 같으면 장마당에 간간히 보였던 중국산 약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얼핏 들은 생각이 내가 직접 중국에 가서 약을 사와야겠다. 그러면 좀 더 눅은()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었다. 19977월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밀입국하여 지인이 있는 OO시로 갔다.

- 중국의 현실에 놀라지 않았는가.

안 놀랐다면 북한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일반 노동자가 한 달 일하면 중국돈 500원을 받았다. 이것은 북한돈 15천원에 해당된다. 그때 북한에서 쌀 1kg30원 할 때이었으니 쌀을 사면 500kg을 사는 것이다.

너무나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그래서 한 달간 일해서 돈을 벌어 북한에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훗날 한 달 일해 돈을 벌어 가겠다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6개월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 이후 어떤 생활을 했나.

일단 OO시보다는 공안단속이 경한 XX시로 이동을 하여 어느 민가에 하숙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나를 보고 교회에 나가면 숙박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다. 무척이나 놀랐다. 친척도 의인도 아닌 정말 불쌍한 북한여자를 위해서 두 사람이 밥을 굶으며 기도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당시 중국에서 일반 노동자가 한 달 일하면

중국돈 500원 받아...이것은 북한돈 15천원

그때 북한에서 쌀 1kg30원 할 때이었으니

쌀을 사면 500kg 사는 것으로 눈이 번쩍 떠져

 

중국 어느 민가에 하숙...집주인이 교회에 나가면

숙박비를 받지 않겠다면서 나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는 것 보고 무척이나 놀라...친척도 의인도 아닌

불쌍한 북한여자 위해서 두 사람이 밥을 굶으며

기도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당황하던 기억 생생해

 

 - 다른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중국 조선족교회에 3년간 열심히 다니면서 호구(주민등록증)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는 비용은 중국돈 5천원이다. 1천원이 모자라서 전도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가 신학교에 가는 조건으로 1천원을 그냥 주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신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면서 결국은 내가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에게 속아서 살았다는 것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위안을 가졌다.

- 생명안전의 위험은 없었는가.

이후 OO시로 가서 북에 남겨진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돈이 필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항상 불안한 신분인 탈북자다. 그러던 중 한국에 입국하면 정착금 받아 500만원을 준다는 조건으로 여권을 만들어 한국행 비행기를 대련에서 탑승했다. 게이트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아무 일 없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이륙직전 공안의 불시검열에 걸려 탈북자임이 탈로 되어 현장 체포되었다. 20026월이다.

- 북송되었는가.

한 달간 도문감옥에 갇혔다. 대략 5000명의 북송 대기 중인 탈북자들이 있었다. 매일 버스에 태워 북송해도 대륙에서 탈북자들이 계속 잡혀 들어왔다. 온성보위부를 거쳐 청진보위부로 이송이 되었다.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서 잡혔기에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참고로 중국공안은 탈북자의 행적을 그대로 북한당국에 통보한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 자료가 들은 가방을 기요원(문서연락관)이 분실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지인 관계자가 서류를 위조하여 한국기도자’(남조선으로 가려고 했던 사람) 명단에서 뺐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적이다. 10개월간 강제노동 후 석방되었다.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북한감옥 안에서 오히려 한국행 방법을 알았다. 거기에는 한국행 시도하다가 불발되어 온 사람들이 많았다. 20035월에 석방되어 한 달 만에 다시 국경을 넘어 OO시로 갔다. 거기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몽골로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니 왼지 석연치 않았다. 밤낮으로 고민을 하다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을 경유하여 20045월 그렇게 오고 싶었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2006년 총신대학교 신학교 3학년에 편입

20086월에 졸업...2012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 이후 목사안수를 받아

피어선신학대학원 목회상담박사 과정 수료

 

- 사회로 나와서 어떤 생활을 하였나.

브로커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에 돈을 벌어야 했다. 식당에 가서 서빙을 5개월 하면서 번 돈으로 일단 브로커비용을 물었다. 배우고 싶었다. 이후 2006년 총신대학교 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20086월에 졸업(석사)을 하게 되었다.

2012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석사)했고 이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대학원 목회상담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모든 공부는 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병행하였다.

- 힘들었던 순간은 어느 때인가.

내 경우를 보니 탈북민들은 남한생활 초기 북한사투리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고생을 한다. 수십 년 써왔던 고향의 사투리를 한두 달 안에 고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일상에서 북한사투리가 나오면 한 번씩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사투리 교정을 했는데도 4~5개월은 걸리더라. 일부 탈북민들은 혹시 북에서 왔어요?” 하는 남한사람들의 질문에 아니요. 중국에서 왔어요라고 답하기도 하는데 굳이 북한에서 온 것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70년이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통일을 어떤 형식으로든 꼭 주실 줄 믿는다. 현재 분단된 남과 북의 사회에서 물리적인 것보다 사람 대 사람과의 통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는 복음통일이라고 본다. 그걸 미리 준비하라고 이 땅에 35천명이나 내려 보내주신 복음의 용사, 탈북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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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속의 집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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