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기쁨과 행복누리는 탈북민 ‘다둥이 가족’ 이야기

[인터뷰] 탈북여성 이소라 (주)LG생활건강 카운슬러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4/05/08 [18:44]

참된 기쁨과 행복누리는 탈북민 ‘다둥이 가족’ 이야기

[인터뷰] 탈북여성 이소라 (주)LG생활건강 카운슬러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4/05/08 [18:44]

가정의 달 5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이 모두 5월에 있다. 이런 날들은 북한에 전혀 없고 ‘3·8국제부녀절’(38, 국제여성의날)과 김정은 시대에 제정된 어머니의 날’(1116)이 있다. 1990년대부터 북한에서도 결혼한 부부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다. 한 명 정도가 고작이다. 식량 때문이다. 당에서는 다자녀 출산을 장려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사회에서 살았던 탈북여성들은 남한이 여자가 살기 좋은 나라임을 알고 너무 기뻐한다. 북한서 여자들이 도맡아하는 빨래, 세탁, 집안청소 등은 전부 기계가 하니 말이다. 식량이 부족한 북한은 살림하는 여자가 살기 힘든 곳이고 반대로 남한은 여자가 사회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기 편한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 고양에서 탈북여성 이소라 주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세 자녀 다둥이를 소개해준다면.

아들 1, 2명을 낳았다. ‘고난의 행군’(북한에서 300만 인민이 식량이 없어 굶어 죽은 1996~1999) 시기 북한에서라면 정말 쉽지 않은 현상인데 대한민국에 와서 살다보니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처음 한 명 낳고 만족하자고 했던 것이 또 한 명 생기고, 또 반복이 되고... 그렇게 해서 3명을 낳았다. 그러다보니 애들이 서로가 나이 차이가 조금씩 있는 편이다. 주변에서 우리 같은 가족을 다둥이 가족이라고 부른다.

잘 생긴 아들은 대학생이고 예쁜 두 딸은 각각 초등학생 5학년, 1학년생이다. 아침부터 남편 출근준비, 아들과 두 딸을 등교시키는 것이 전쟁이나 다름없다. 특히 여자애들은 엄마 손이 가야할 부분이 많다. 그럴 때마다 그래?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생사판가름의 고난의 행군보다는 쉽지!” 하고 힘을 낸다.

- 엄마의 힘은 어떤 것인가.

분신과도 같은 내가 낳은 자식이다. 어떤 때는 가만히 자신에게 만약에 내가 아니면 저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반문해보면,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 자식들은 함께 해야 할 공동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 키우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면 힘들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의 선물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힘든 것이 없다. 우리 부부가 열심히 교회를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가정의 행복이라고 본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9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4남매의 맏이였다. 아버지는 OO운송사업소 자동차운전수였고 어머니는 부양이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월남하였으니 우리 집안은 그로인해 여러모로 당국의 불이익을 받으며 살았다.

17살부터 운전을 한 아버지는 40살이 돼서야 겨우 노동당에 입당을 하게 되었다. 나와 동생들이 고등학교시절 공부와 예능에서 특출한 성적을 받았으니 상급단체 및 학교진학은 불가능했다. 모두 월남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월남

당국의 불이익 받으면서 살아

17살부터 운전을 한 아버지는

40살이 돼어 노동당에 입당.

 

- 고교시절 행복한 추억이 있다면.

고등학교 문학 서클소조에 가입하였다. 이때 외국소설 등을 보면서 사람이 태어나서 비행기도 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학을 해서 비행기를 타보기는 힘들 것 같고 체육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청소년사격 구락부에 가입하여 선수 활동을 하였다. 전국 1등 한 번, 3등 두 번했다. 중앙의 우수선수 선발 모집에 걸려도 할아버지 월남이력 때문에 아버지가 한사코 반대하였다.

- 토대에 대한 원망은 없었는가.

당연히 있었다. 근 반세기 전에 할아버지가 월남한 경력이 왜 얼굴도 모르는 손녀인 내가 그 피해를 보아야 하는지 정말이지 북한정권은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괴상한 집단이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손녀는 손녀가 아니겠는가.

당시 나이가 어려워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한 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노동당 독재체제를 유지하자니 그런 연대책임제도(연좌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 처벌이 없다면 북한주민 너도나도 모두 탈북 할 것이다.

경력은 1995년 양강도연유공급소 보위대서 1년간 근무했다. 북한서는 연유가 귀하기에 연유창고는 실탄을 장전한 무장보초를 선다. 장사를 하고 싶었다. 허나 아버지가 공부하고 직장생활 해야 정상이다며 나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하여 간호전문학교(2년제)를 졸업하고 양강도산원(산부인과전문병원)에 간호사로 배치를 받았다.

- 병원(산원) 이야기를 해 달라.

병원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지급되는 월급, 식량배급 등은 전무하다. 수술 및 입원환자 면회 오는 가족에게서 식사(혹은 돈)를 대접받으면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아내 혹은 남편들이 무슨 장사를 해서든 돈을 벌어야 밥을 먹고 산다.

산원 건물 뒤편으로 압록강이 흐른다. 병원에 수돗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여름이면 압록강에 나가서 환자들의 병원복이며 침대보 등을 빤다. 병원에도 정전이 수시로 되었다. 모든 것은 병원 자체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 환자들에게 무상치료를 하는가.

일단 공화국(북한)의 법이 무상치료라고 되어있기에 병원에서 돈은 안 받는다. 환자에게는 수술 당일에 필요한 약만 지급된다. 나머지는 전부 본인이 마련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에 필요한 약 이름을 처방하면 끝이다. 그 후에는 환자가족이 처방전을 갖고 장마당 혹은 개인집을 몰래 다니며 약을 구입해온다.

다른 병원들도 사정은 같다. 산원뿐만 아니라 도()병원, ()병원, ()병원 할 것 없이 북한의 모든 병원이 그렇게 운영되었다. 아마도 평양의 중앙병원도 별 차이는 없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북한의 유일사상체제의 사회이기에 정치사상 분야에서 전체 인민이 당의 노선대로 따라야 한다. 사회풍토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공화국 법이 무상치료되어있어

병원에서 돈 안 받아...환자에게

수술 당일에 필요한 약만 지급

나머지는 전부 본인이 마련해야

 

의사는 환자가 치료에 필요한

약 이름만을 처방...환자가족이

처방전을 갖고 장마당이나 혹은

개인집을 몰래 다니며 약 구입

 

 

- 또 다른 환자부담이 있다면.

일부 환자의 임신중절’(임신 중 태아를 없애는 것)과 고리(루프) 삽입 등이다. 불법수술이며 의사에게 뇌물(·담배 등)을 바치면 몰래 해준다. 환자(임산부)가 입원기간 먹어야할 식사, 의약품, 병실 청소도구까지 본인이 준비해야 한다.

말이 무상치료이지 유상치료나 마찬가지이다. 병원에 바치는 술, 담배, 의사·간호사들의 식사 준비까지 모두 돈이다. 어찌 보면 환자의 2중 고통이다. 돈만 지불하면 간단하겠는데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와야 하니 말이다.

- 원단장사를 했다는 소리는 뭔가.

꼬박꼬박 출근을 해도 월급과 식량이 전혀 없는 간호사 생활은 5년간 하고 그만두었다. 당시는 돈과 음식을 만지는 직업이 최고이었다. 사직 후 2년 뒤 어머니가 그동안 혼자서 하던 원단장사에 뛰어들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원단을 대량으로 전국 각지에 도매하여 이윤을 남기는 장사인데 제법 맛이 쏠쏠하였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은 정말 해괴망측한 사회이고 집단이다. 나라에서 인민들에게 쌀을 배급해주지 못하면 장사라도 허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요소라고 강력히 통제한다. 물품이나 돈이 많아도 그 이유를 따진다. 결국은 공권력으로 단속하는 안전원(경찰)들도 사회질서 통제를 핑계로 자기 호주머니를 뇌물로 채우는 것이다.

- 탈북 계기가 궁금하다.

원단장사로 북한 전역을 다니면서 인민이 쌀이 없어 굶어죽는 이 나라는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하는 인식이 머리에 강하게 박혔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20126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밀입국하였다.

재수 없게도 중국 땅을 밟은 날, 택시기사가 신고를 하는 탓에 공안에 단속이 되었다. 애원했다. 북한에 가고 싶지 않다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공안은 나를 공개적으로 북송하지 않았고 국경지역 모처에서 몰래 추방시켰다.

재 탈북은 밤새껏 고생하고 날이 밝기 전에 국경초소를 벗어나 내가 떠난 출발지(신파)에 다시 왔다. 몸을 추스르고 일주일 후 다시 탈북했다. 택시를 안타고 저리 브로커가 준비한 차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좋은 중국 사람을 만나서 2년간 안전하게 살았다. 배고픔과 추위는 해결이 되었는데 탈북자 신분이어서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곤명,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4년 여름 꿈에도 그리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쌀이 없어 굶어죽는 나라는

희망 없다는 인식이 머리에

강하게 박히며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자고 20126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밀입국

곤명, 태국 등 거쳐 2014

여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 정착생활 초기는 어떻게 보냈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간호사학원을 실습 포함하여 1년간 다녔다. 그 과정에 가만! 여기 남한의 직업의 자유가 있지? 그리고 직업도 너무 많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북한에서 많이 했던 일은 간호사보다 장사였다.

고객을 상대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업(상품판매)을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주식회사 LG생활건강 카운슬러 직업이다. 일종의 전문 상담원으로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고객에게 찾아가서 판매하는 일이다.

- 어떤 방법으로 고객을 찾아가나.

내가 이 일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카운슬러가 고객의 집을 방문하며 판매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방법이 전혀 없다. 모두 SNS, 단체모임 방문, 지인 및 고객의 소개 등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일을 8년차 하고 있다. 그동안 단골이 된 고객도 적지 않다. 꾸준한 고객 관리, 정성스러운 서비스 등이 기본이다.

 

고객을 상대 하며 여러 방법으로

영업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

주식회사 LG생활건강 카운슬러 직업

전문 상담원으로 화장품과 생활용품

고객에게 찾아가 판매...단골도 늘어

 

자기를 위한 일에 절대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어...항상 기쁘고 감사하고

보람 있는 마음으로 하면 최고의 일

 

- 본인만의 고객관리 비법이 있다면.

돈 많은 재벌회장들이 왜 일할까? 무슨 일이든 우선적으로 자기의 정신관리와 건강유지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본다. 자기를 위한 일에는 절대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다. 기쁘고 감사하고 보람 있는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최고의 일이다.

내 고객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이 일에서 친절과 미소는 고객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비법이다. 두세 번, 그 이상 찾아가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인내성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서 진심을 보이는 것이다.

-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은.

나처럼 세 자식을 키우는 여자도 당당하게 일을 한다. 이유는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의 대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돈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탈북여성들은 목숨 걸고 온 이 땅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한다. 안 좋은 것은 경력 부풀리기, 거짓말 등이다. 이런 것은 북한에 버리고 왔어야 하는 나쁜 버릇은 남한에서 갖고 있을수록 인생의 손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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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명승지 등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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