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에 있는 엄마가 북한에 있는 아들 만나는 것이 통일이다"

[인터뷰]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출연 이소연 탈북여성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4/09/06 [17:52]

" 남쪽에 있는 엄마가 북한에 있는 아들 만나는 것이 통일이다"

[인터뷰]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출연 이소연 탈북여성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4/09/06 [17:52]

올해 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날’(714)을 맞아 지난 78일 서울특별시청 지하2층 바스락홀에서 북한과 탈북을 소재로 만든 인권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상영회 및 출연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영화내용은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데려오려고 시도하는 탈북엄마와 어린 자매부터 할머니까지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5명의 일가족을 돕는 김성은 목사의 활동이다. 매들린 개빈 감독이 제작한 비욘드 유토피아는 올해 1월 개봉했고 국제영화제에 출품해 수상을 했다.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출연했던 이소연 탈북여성을 만났다.

 

- 영화에 출연한 이유는 뭔가.

중국 및 북한 브로커들과 연계하는 과정에 6살 때 두고 떠났던 아들이 고향에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안도의 숨이 나갔다. 아들은 그림그리기와 서예(붓글씨) 재능이 탁월했다. 평양에서 진행한 서예경연에서 우수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의 탈북으로 군대입대나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렵게 연락해 아들(한정청 현재 22)이 엄마가 있는 곳으로 오고 싶다는 의향을 확인했다.

 

-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한국에서 탈북민 구출과 선교에 유명한 김성은 목사(갈렙선교회)와 연계를 했다. 그로부터 마침 미국영화사에서 중국 내 탈북자 구출과정을 찍을 계획이고 이왕 아들이 한국으로 무사히 오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자는 제안에 공감했다.

이후 돈을 들여 아들을 중국으로 탈북 시키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후에 생겼다. 약속과 달리 중국브로커가 유동비용을 엄청 높게 부풀렸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악질브로커들은 아들을 공안에 신고해서 북한으로 북송시켰다.

 

- 당시 심정을 말해준다면.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아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면 다행이나 실패하면 악재가 된다. 전화통화 했던 아들이 보위부에 수감된 걸로 추정하나 필히 용기를 냈다. 내가 아들의 탈북시도를 숨기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이름과 얼굴, 나이 등을 당당히 공개하는 것이 북한당국을 곤혹스럽게 할 수 있다고 결심했다.

 

- 영화가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던데.

미국의 유명영화제인 2023 센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다큐멘터리)을 수상하였고 영국 아카데미시상식(BAFTA) 다큐멘터리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북에 남겨진 22살의 아들을 꼭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북한의 참혹한 인권실상을 알리고 또 자유를 찾아오는 탈북민들의 생동한 모습을 그린 다큐 영화이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내 인생에 한 번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가함은 커다란 영광이었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고 1975년생이다. 아버지는 김정숙교원대학 혁명역사학부 교원(교수)이었고 어머니는 한때 회령시여맹위원장까지 했다. 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을 피운 것은 친구의 인민군대 5년 복무하고 노동당원이 되겠다는 소리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조선노동당에 입당해야 가급적 사회적인 발전(출세)을 할 수 있다.

 

북한에 있는 아들 한정청을 찿는 엄마 이소연 

- 인민군 이야기를 해준다면.

3개월간 혹독한 신병훈련을 받고 배치 받은 부대는 인민군 4군단 사령부 직속 통신소(중대보다 크고 대대보다 작은 부대). 지난 1995~6년 경 인민군에서 전당, 전민, 전군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강연을 수시로 해주었다.

부대(사단, 연대, 대대)에는 국가에서 받는 식량(, 옥수수, 감자, 밀가루 등)70%인데 말이 그렇지 어떤 때는 40~50%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때부터 군인병사 1일 식사량이 기존 800그램에서 반 토막인 400그램으로 줄었다.

 

- 제대는 언제 하였는가.

인민군대 입대 3년 후부터 통신부대 양식서기를 맡았다. 자그마치 120여명 군인의 입과 피복 등을 도맡은 자리다. 제대하기 1년 전 노동당에 입당하였고 후보당 시절까지 마치고 2001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업은 회령수출품피복공장에 배치를 받았다. 식량배급도 없는 직장일 보다는 그래도 밥을 먹는 개인장사를 했다.

 

- 그러면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국가서 공급하는 식량배급이 없으니 힘들었다. “중국 가서 한 달만 일해도 조선에서 1년은 잘 산다는 소리에 귀가 커졌다. 가족을 살릴 수 있다면 한 달이 아니라 1년이라도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배짱이 생겼다.

2006년 두만강을 몰래 건넜으나 인신매매에 걸렸으며 운이 나쁘게도 비공개로 북송이 되었다. ()단련대(강제노역장)와 시()보위부 구류장서 18개월 복역하고 나왔다. 20084월 재 탈북해 5월 한국으로 입국했다.

 

-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가.

지난 20111월에 설립한 전국에서 유일한 탈북여성인권 및 정착단체인 뉴코리아여성연합을 이끌고 있다. 우리 탈북여성들이 북한 및 중국과 탈북과정에서 받았던 인권침해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수집, 기록, 공개하는 일을 진행한다. 북한인권과 북한내부 실상에 대한 인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일반국민, 대학생, 청소년,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 꼭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북에 있는 아들이 제발 살아있기만을 기도한다. 이 엄마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분신이다. 꼭 살아서 엄마가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여기 대한민국으로 와주기를 바란다. 6살 때 헤어진 사랑하는 아들, 의젓한 청년 내 아들 한정청(22)을 힘껏 껴안는 것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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