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6.23선언 발표...북한은 연방제 통일방안 제시

[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③
국토통일원 3대 김용식(金溶植)장관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05/28 [16:18]

박정희 정부, 6.23선언 발표...북한은 연방제 통일방안 제시

[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③
국토통일원 3대 김용식(金溶植)장관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05/28 [16:18]

김용식은 외교관으로서 한일회담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1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일본과의 외교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4.19 혁명 후 장면 정부에서 외무부 차관에 올랐다.

 

  김용식 전 국토통일원 장관

김용식이 국토통일원장관으로 부임한 기간은 1973123일부터 1974917일까지 약 9개월이었다. 그가 통일원장관 부임할 당시 한반도 주변 정세는 급변했다.

 

먼저, 동서독간의 관계 정상화를 들 수 있다. 분단국가인 동독과 서독은 1972년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정상화했으며, 19739월에는 나란히 유엔에 가입했다. 두 번째로, 미국의 베트남 철수를 들 수 있다. 국내 반전 운동 속에 미국은 19731월 파리 평화조약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공식 종결하고 철수했다.

 

북한 19739월 유엔 상주대표부

설치하고 다양한 유엔 전문기구 및

국제기구에 가입, 국제적 입지 넓혀

 

세 번째로 한미 관계의 냉각이다. 닉슨 대통령의 대공산권 접근 정책, 주한미군 철수 논의, 닉슨 독트린 등으로 한미 관계는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또한, 미국 의회는 해외 원조법에 수원국의 인권 문제를 명시하며 한국을 압박했다.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도 박정희 정부를 압박했다. 북한은 19739월 유엔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고 다양한 유엔 전문기구 및 국제기구에 가입하며 국제적 입지를 넓혔다. 이런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와 김용식 통일원장관 취임 전인 1972년 말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사회가 꽁꽁 얼어붙었다.

 

한편, 북한 대표단은 28차 유엔총회에 참석하면서부터 한국문제에 적극성을 띠었다. 북한은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주장하며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남북관계에서 박정희 정부는 6.23선언을 발표했고, 북한은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를 본 국제사회는 남북관계가 호전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남북이 서로 일방적인 주장을 할 뿐 개선이 없었다.

 

1973310일 남북조절위 제1차 간사회의가 열렸을 때, 북한은 군비경쟁 중단, 군축, 미군철수, 남북간 평화협정 체결 등 5개 항 군사제안의 선결을 요구하는 한편,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를 제의했다. 이에 대해 우리측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316일 기자회견을 열어 휴전협정이나 7.4남북공동성명을 성실히 지키는 신념이 중요하다며 평화협정 대신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이 남북조절위 회담에서 계속 반공법, 보안법 등 해방 이후 형성된 우리의 치안질서와 겨우내 확보한 국방력,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흔들자,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낮아졌다. 4월부터 6월까지 남북조절위 간사회의 두 번과 본회담을 한 번 개최했다.

 

1973623일에 우리 정부는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이하 ‘6.23 외교선언으로 약칭)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우리나라는 동서독처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국제기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과 상호 문호를 개방하자는 과감한 제의를 했다.

 

김일성은 7.4공동성명 직후부터

군수경제를 분리하고 중요 군수

공장을 지하 화하는 등 전쟁준비

 

이것은 그동안의 경제발전을 토대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것으로 남북관계에서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한 것이었다. 동시에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선의의 경쟁을 선언했다. 이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은 한 달 전인 19735월에 북한이 유엔 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유엔에서 중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 북한이 대표단을 보내면서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 대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정책전환을 한 것이다.

 

우리가 6.23선언을 한 1973623일 북한 김일성은 체코 총비서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설에서 조국통일 5대강령이라고 부르는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면서 연방제로 남북을 합친 고려연방공화국을 창립한 뒤 한 나라로 유엔에 가입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의미는 우리나라의 유엔감시 하 자유선거에 의한 대표 선출과 통일정부 수립 구상을 반대한다는 메시지였다.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을 사실상 반대하는 것도 문제지만, 북한이 내놓은 연방제안은 트로이 목마와 같아 어떤 분열행위를 할지 몰라 섣부르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6.23 외교선언을 두 개의 조선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자 7.4공동성명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국토통일원장관은 통일의 방안과

통일 후 제반정책 및 국토통일에

관한 교육, 홍보, 선전 업무 주관

 

1973828일에 북한은 김영주 남북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 명의로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다음 날인 829일에 북한 김영주의 성명을 비판하면서 북한에게 8.28성명을 철회하고 대화에 나오라고 촉구했다.

 

북한은 남북대화에 나오는 대신, 유엔을 통한 외교로 방향을 틀면서 휴전체제를 흔들었다. 동시에 197310월 하순부터 대남비난 방송과 전단 살포를 재개했다. 사실 북한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7.4공동성명 직후부터 군수경제를 분리하고 중요 군수공장을 지하 화하는 등 전쟁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숨겼지만, 사실은 대화를 깰 핑계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북한은 서해를 분쟁 수역화 했다. 그들은 1973121일 군정위 회의에서 처음으로 서해 5도 수역에 대한 북한의 관할권을 주장했다. 우리 배가 북방한계선 이남의 서해 5도로 가려면 북한수역을 통과하므로 북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갑작스런 현상 변경 주장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백령도 등 5도와 서해 북방한계선 이남 서해는 분단 이후 줄곧 대한민국에 속했고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을 향해 귀측도 휴전 이후 1973년까지 20년간 준수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북한은 또 갑자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1974325일 미국 의회에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세부적으로 미북간 불가침선언, 한미 군비증강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했다. 이후 계속해서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되풀이했다.

 

우리정부는 미·북 평화협정 주장을 일축하면서 1974118일 남북 간 상호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1974815일의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남북 간에 상호 불가침협정을 체결할 것과 상호 문호를 개방하면서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하고, 장차 토착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로 통일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시기 김용식 국토통일원장관은 통일의 방안과 통일 후의 제반정책 및 국토통일에 관한 교육, 홍보, 선전 업무를 주관했다. 당시에는 정부 직제 상 국토통일원이 남북관계를 주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 결과 김 장관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당시 남북관계나 회담, 협상 업무는 대공(對共) 업무로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관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8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하고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을 이루어야 한다. 이 바탕 위에서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 하에 토착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이룩한다고 선언했다.

 

학력 및 약력

김용식은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에 유학가서 주오대학(中央大学)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변호사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외교부에 들어가 홍콩, 호놀룰루 영사로 외교관 경력을 시작해 1951-57년 일본대사관 공사, 1957-58년 프랑스대사관 공사, 제네바 한국대표부 공사를 했다.

19615.16 군사쿠데타 후 1961.7-1962.8 영국 대사로 근무, 1년 만에 군장성 출신(이형근)에 밀려 1962-63년 필리핀 대사로 부임, 19633.16-12.16. 외무부장관, 1964-70년 유엔 대사, 1971.6.4. - 1973.12.3.외무부장관 역임 후 1973.12.3. 국토통일원장관이 되었다.

 

  외무부장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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