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북한 동등 대우'에 남한 반발...“인구 비례해 대표 선출해야”[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 ③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 후 통일정책한국전쟁이 끝나고 1년 뒤인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렸다.
근거는 휴전협정인데, 한반도에서 외국군의 철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목적으로 회담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한국전쟁 유엔 참전국과 공산국측이 전부 참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변영태 외무부장관, 북한에서는 휴전회담 수석대표였던 남일, 미국에서는 덜레스 국무장관, 영국에서는 엔서니 이든 외무상, 소련은 몰로토프 외무장관, 중국은 저우언라이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그 당시에는 꽤 나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북한은 통일방안을 내놓을 때 항상 전제조건 걸어...외국군대 철수 전제
남북한 동등하게 ‘전조선위원회’라는 공동의회를 구성해 그 의회서 선거법 만들고 총선거 실시하자는 방안 내놔
미국은 덜레스 국무장관이 참석한 뒤 곧 돌아가고, 국무차관이 대신 참석했다. 미국은 이 회담의 중요성을 높게 보지 않았고 전망이 어두울 것으로 봤다는 증거다.
이 회담 자체가 휴전협정에 담긴 이유도 공산측에서 주장해서 합의되었다. 공산측 대표는 휴전되더라도 남북한은 분단되고 이 과정에서 통일된 한반도의 국가 수립문제는 여전히 숙제가 될 것이므로 회담을 열어 계속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또 외국군이 철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휴전은 전쟁을 멈춘 상태이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평화조약을 맺어야 되니 계속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유엔군측이 받아들였다.
통일방안에 대해 북한은 처음부터 남북한을 동등하게 놓고 ‘전조선위원회’라는 공동의회를 구성하여 그 의회에서 선거법을 만들고 그 선거법에 의해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안을 내놨다.
북한의 남북한 동등 대우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북한의 인구가 달랐기 때문이다. 남쪽에는 인구가 북한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똑같이 취급하면 남쪽을 차별하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북측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북한이 인구에 비례해서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북한은 통일방안을 내놓을 때 항상 전제조건을 걸었다. 외국군대의 철수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 외국군은 미군이다. 북한이 주장대로 미군 철수를 한다면, 침략 받았던 우리나라로서는 안보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된다. 약한 우리나라 국군으로는 또다시 위태로움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엔참전국들 대다수 나라는 대한민국 정부와 약간의 온도차가 있었다. 유엔참전국들은 이구동성, 남북한이 마음을 열어놓고 1948년 때처럼 총선거를 해라.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다시 해서 선량들, 국회의원을 뽑고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 수립, 대통령 선출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놓은 대안은 1948년에 소련군이 막아서 북한 내 총선거를 못했으니 이제라도 북한만 총선거 실시, 거기서 뽑힌 국회의원을 남쪽 국회의원과 합쳐 통일정부 수립, 통일문제 등 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럴듯했지만, 1948년에 그 과정을 거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당황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1948년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되풀이하라고 하니 수긍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엔참전국은 한국정부 대표단에 귀띔을 해주었다. 어차피 이런 제안은 공산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대한민국 정부가 수용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참전국들의 방안을 강하게 반대하고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1948년에 합법적으로 유엔감시 하에 총선거를 거쳐 국회가 구성되고 국회에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에 또 다시 48년도 방식을 되풀이 하라는 것은 국가 주권에 어긋나고 우리나라 국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놓은 대안은 과거 1948년에 소련군이 막아서 북한 내 총선거를 못했으니 이제라도 북한만 총선거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뽑힌 국회의원을 남쪽 국회의원과 합쳐 통일문제, 통일정부 수립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니까, 유엔참전국은 중재안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은 당해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총선거를 해서 국회의원을 뽑고, 북한은 유엔감시 하에 총선거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 역시 1948년에 합법적으로 유엔감시 하 에 총선거를 통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흔드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대한민국 대표 변영태 장관이 유엔참전국의 중재안에 대한 투표에 참가했다. 물론, 결과는 유엔참전국은 전부 찬성하고 공산측 참자가는 예상대로 전원 반대했다. 부결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변영태 장관이 대통령의 훈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돌아온 즉시 해임했다.
북한의 '남북한 동등 대우'... 우리나라는 이 주장을 배격하고 인구 비례 원칙에 입각한 통일 방안 고수...국민 100명이 선출한 국회의원과 10명이 선출한 의원의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 판단
북한은 제네바회담을 필두로 통일과 관련하여 진정성 없는 정치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주장 중, 이승만정부가 강력히 반발했던 부분은 북한의 '남북한 동등 대우'였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이 주장을 배격하고 인구 비례 원칙에 입각한 통일 방안을 고수했다. 이는 국민 100명이 선출한 국회의원과 10명이 선출한 국회의원의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 기반 한다.
유권자의 표의 가치가 동등해지려면 선거구별 인구수가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 따라서 인구수를 무시하는 북한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북한은 인구 차이를 무시하고 남북한이 동수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1대1로 통일 한국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인구가 명백히 다른 상황에서 남북한 정치 지도자들이 1대1의 지분을 가지고 임의로 담합하거나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국민 전체의 뜻을 왜곡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 방안은 유엔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이렇게 선출된 남북한 국회의원들이 통일 정부를 구성하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렬된 결과, 그 파장이 대한민국에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회담 후 우리 정부가 수립된 방식 외에 북한정권과 담합하는 것을 불법 시 했다.
진보당 조봉암은 평화통일론 내세워 남북이 무력 사용하지 않고 합의하에 평화통일 실현하자는 급진적 제안은 이승만 정부의 통일방안과 너무 달라 북한 달래주는 포용정책 첫 스타트
1956년에 결성된 진보당의 당 창건 리더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남북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호 합의하에 평화통일을 실현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통일방안과 달랐고 대한민국의 국시를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조봉암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력사용을 배제한다는 것 자체가 그럼 방어도 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남북이 상호 합의하에 한다는 것은 결국은 남북한의 정권을 잡은 자들끼리 상호 합의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부에 있는 국민, 즉 민초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남북한 상부의 정권담당자끼리 담합할 것이 아니라 남북한 주민의 의견수렴을 거쳐 통일해야 한다고 본다.
조봉암은 그 자신 반공주의자라고 말했는데,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한 대북정책은 오늘날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북한을 달래주는 포용정책의 첫 스타트라고 볼 수 있다. 즉 원조였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정권 실세들끼리 담합할 수 있고, 무력을 배제한다고 하니, 이러다가 우리의 안보가 소홀해지는 것 아닌가 우려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정부는 위험하게 봤다. 나라가 망한 뒤에 통일되면 무엇하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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