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의 국론 분열·무책임한 통일 논의 등 지양...연수·홍보 활동 추진[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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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상근 국토통일원 장관 |
국내 상황을 보면 박정희 정부는 유신 치하에서 긴급조치 등을 통해 학원가를 강하게 규제하고 통제하던 시기였다.
국제정세는 국제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가 도미노처럼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의 공산화 위협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안보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남북관계는 경색되었는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조성되었던 대화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남북한은 다시 냉전 시대로 돌아가 상호 적대하며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통일원 차관에는 북한 출신인 동홍욱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이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정부가 안보강화와 더불어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고심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차관 생활 7개월 만에 장관이 된 유상근 국토통일원장관은 그간 부족했던 통일정책 홍보에 심혈을 기울일 뜻을 피력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돈이 없는 북한은 서방 각국에 체제와 주장을 실어 선전하는데, 정작 대한민국은 훌륭한 통일 방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홍보를 하지 않아 국내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6년 2월 유 장관은 취임 후 처음으로 대통령 업무보고를 했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어떤 상황변화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정책 연구, 남북대화 재개에 대비할 대책, 가상 연습 등을 수립, 시행해 나가겠다고 보고하고, 유사시 활용할 대북관계 정책 자료의 체계화 통일 문제와 관련된 중·장기 대책 등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담 재개 준비, 협상안 마련, 모의연습, 유사시 대책, 미래 중장기 대책 등 연구에 중점을 두겠다는 말이었다.
남북관계가 닫혀 있는 현실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교육과 홍보 강조
북한에 대한 지역·분야별 정밀 연구 계속
남북 역량 비교, 공산주의 이길 교육계획
추진 밝혔으나 1년 3개월 만에 물러나
국토통일원에서 남북대화 업무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 무렵부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이전에는 중앙정보부 업무였던 것으로 안다.
유 장관은 남북관계가 닫혀 있는 현실상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교육과 홍보를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예상하면서, 북한의 오판을 줄여줄 우리 내부의 국론 분열 요소나 무책임한 통일 논의 등을 지양하고 국론을 순화하기 위한 연수·홍보 활동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 박정희 대통령과 유상근 장관 |
그 외에도 통일에 대처하여 북한에 대한 지역별·분야별 정밀 연구를 계속하고, 남북 역량 비교, 공산주의에 이겨 나갈 교육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북한이 대규모 외채를 갚지 못하는 상황이 한반도에 위기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북한의 75년 말 외채총액은 21억4천4백만불, 대일 채무만도 3억8천6백만불에 달했다. 북한이 외환 위기의 돌파구로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고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국회에서는 4자회담 외교대책, 유엔 총회에서의 공산측 결의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상임위 외무위원들은 통일원의 북한정세종합보고에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고, 통일원 산하 평화통일연구소의 연구과제가 타 부처와 중복된다는 점과 예산 미확보를 비판했다.
유 장관은 일할 만하다고 생각할 무렵인 1976년 12·4개각으로 물러났다. 결국 그는 통일원에서 장관, 차관까지 합친 근무 기간이 1년 11개월이었다. 대체로 당시 통일원장관의 임기가 짧았다. 유 장관은 사임 후에도 통일문제에 애착을 보이며 연구를 놓지 않았다.
※ 유상근 장관은 1922년 부여 출생, 미 피츠버그대 대학원, 미네소타대 대학원 수료, 충남도 산업국장, 서울 문리사대 학장, 명지대학장, 1977년 9월 10일 기독교 안의 각 반공 단체 간의 협력과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반공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한국 기독교 반공 협의회’ 초대 이사장, 명지학원 설립자 겸 명지대 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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