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기는 길은 경제적 우위 확보...“잘 사는 나라 만드는 것"[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박정희 정부의 반공과 경제우선 정책 ⑤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과 군부 소장 층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새벽 5시에 라디오방송으로 다음과 같이 포고문을 알렸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5.16쿠데타 후 집권...혁명 동기와 출발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배경에는 권력욕, 사욕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 가난 극복, 풍요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공통된 꿈과 동기가 있었다.
박정희 소장뿐 아니라 영관급 장교들까지 같은 포부를 품고 있었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한 군부는 무능과 부패에 빠진 정권을 대신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어 ‘혁명공약’을 내세웠는데, 그 핵심은 ▲반공 강화 ▲국제협력과 자유우방과의 유대 공고화 ▲사회 부패 척결과 민족정기 회복 ▲민생고 해결과 자주경제 재건 ▲통일을 위한 실력 배양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경제기획원 설치 등 향후 국가 운영의 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반공노선과 경제 우선 전략
박정희 의장은 북한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통일 논의는 시기상조이고, 오히려 통일을 위해서라도 우선 나라와 국민을 강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는데, 공약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심지어 1961년 9월 북한이 박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미련이 있는 줄 알고 보낸 밀사 황태성 - 일제강점기 친형 박상희의 친구이자 박정희 교사에게 군인으로의 길을 조언해 준- 을 만나주지 않고 처형할 만큼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최우선 관심사는 민생 문제 해결과 경제력 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일본·서독 등 서방의 자유진영 선진국을 주요 협력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한국 안정 차원에서 신정부를 지지하였다. 다만 민주주의 조기 회복을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 의장의 미국 방문이 성사되었다. 박의장은 미국에 가는 길에 일본을 방문했고 거기서 국교 정상화와 청구권 자금 확보를 모색했다.
아쉽게도 미일 두 나라에서 경제자금을 빌려오는 일은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박정희 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라는 소신을 내세우며, 경제력 건설과 자주경제 확립을 국가 재건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다만 북한식 고립적 자주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의 협력을 통한 독립적 경제 건설을 지향했다.
정치개혁...경제개발 현실에 부딪쳐
박 의장은 5.16에 대해 그것을 쿠데타지만, 단순한 정권교체로 보지 않았다. 시대적인 변화, 큰 격변, 전환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즉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일제 식민치하 36년간의 피맺힌 학정, 해방 이후 생겨난 갖가지 고질을 총결산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가난하지 않고 약하지 않는 신생 민족의 나라,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민족중흥을 이룩해나가자는 그런 생각이 바탕에 있었다.
민족경제를 부흥해 외국의 원조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화폐개혁을 통한 자본 축적 시도가 미국의 반발로 실패하자, 결국 미일 방문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외국 차관 도입에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규모가 충분치 않았다. 대안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는 장차 국내 정치 세력과 심각한 갈등을 불러올 예정이었다.
처음엔 민정 참여를 거부하며 기성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맡기려 했던 박정희 의장은 그러나 이들과의 대화에서 근대화, 경제혁명의 비전을 보지 못하며 심각한 실망을 경험했다.
경제개발과 한일관계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그에게 구정치인으로는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고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전역 후 민정 참여와 대통령 당선
결국 박정희 의장은 직접 정치 참여를 결심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정당의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16후 박정희 의장이 계속해서 추진해온 경제발전,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와 각계 인사의 노력 결집, 정치사회개혁 노력이 인정받아 그가 국민으로부터 합법적인 권력 승계자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그는 이후에도 경제발전 우선, 국민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남북관계나 통일 논의는 그의 구상 속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북한을 이기는 길은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경제적 우위를 확보해 “북한보다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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