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북한인권 박물관 건립이 목표...후대는 통일역사 바로 알아야"[인터뷰]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최민경 대표지난 1990년대 중후반(4~5년간) 북한에서 사상최악의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 시기가 있었다. 수많은 공장의 기계가 가동을 멈추었다. 당국의 식량배급이 끊기었고 인민생활 모든 분야가 정지되었다. 이 시기 300만의 북한주민이 굶어죽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1997년 4월 한국으로 망명해온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였다. 북한을 벗어나는 탈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며 현재 중국에는 4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는 3만 4천명의 탈북민이 들어와 있다. 서울 여의도에서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최민경 대표와 마주 앉았다.
-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를 소개해 달라. 탈북민단체인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는 지난 2023년 12월 서울에서 창립됐다. 이름 그대로 중국에서 한차례 이상 북한으로 강제북송을 당해 감옥생활 경험을 가진 탈북민들이 회원이다.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것이 단체 창립 목적이다. 탈북민 인권피해 증거자료수집, 해당기관과 밀접한 업무협력, 국제사회와 공조 등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지난 2024년 11월 5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북한대표부 앞에서 북한정권규탄 집회를 했다. 유엔이 북한의 인권상황을 점검하는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PR)를 앞두고 한국의 북한인권 단체들은 “북한은 주민들의 생존·복지를 위해 써야할 가용자원을 핵개발에 투입하고 청년들을 러시아에 파견하는 등 군사적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며 김정은 독재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전달(대사관 우편함에 넣음)했다. 우리 단체를 포함한 10개의 북한인권단체가 공동으로 진행한 국제적 인권행사다.
- 또 다른 행사가 있었다면. 올해 1월 6일 서울강남임마누엘교회서 한미동맹이승만통일재단(이사장 노영애)과 새해를 맞아 업무협약식(MOU)을 체결했다. 양 단체 대표는 업무협약에 사인하고 서류를 서로 교환했으며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단체 활동이 담긴 동영상이 소개되었다. 한미동맹이승만통일재단은 대표적인 보수애국단체이다.
- 회원들의 힐링 모임도 하던데. 작년 10월 22일 ‘맞춤형 트라우마 회복집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벽초지수목원을 찾아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25명이 참석했다. 이날 탈북민들은 해설사의 강의를 들으며 주목나무정원, 말리성의가든 등을 둘러보았다. 쉴 참에 여왕의정원서 페브리즈만들기 체험을 하면서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눴다. 북한에서 받았던 감금피해의 아픔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 ‘북한주민아사대학살’은 뭔가. 북한에서 부르는 ‘고난의 행군’이란 용어를 대신하여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북한주민아사대학살’로 부르자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어려운 걸음이나 대오를 의미한다. 북한 수령 독재정권의 무능하고 잔인함으로 빚어진 300만 인민이 굶어죽은 대참사를 어떻게 그냥 어려운 행군이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 상당히 일리가 있는 소리이다. 김정일이 1970년대부터 북한 전역에 김일성 동상, 박물관, 기념관을 세웠다. 매년 나랏돈 40%를 탕진했다. 그 후과는 20년 뒤에 나타났다. 또한 동구권사회주의가 붕괴하며 북한의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1994년 김일성이 죽어서 호화궁전에 들어갔기에 수십만의 인민이 아사했는데도 국제사회는 분노하지 않는다. 후대들이 이런 사실은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북한주민아사대학살’이라는 것이다.
- 김정은을 상대로 민사소송 했던데. 올해 7월 11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선노동당 간부들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형사고소장도 제출했다. 탈북자로 첫 탈북시도 후 강제북송 되어 약 5개월간 성적가혹행위를 당했으니 북한의 최고지도자 등을 상대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 고향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다. 1972년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1989년 8월, 안전부(경찰서) 기요원(일정기간 안전부로 출근해서 주민등록서류를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 1997년 12월 어느 날, 친정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왔다. 엄마가 눈물을 보이며 나를 붙잡고 ‘민경아! 이러다가 몽땅 굶어죽을 판이니 중국에 있는 4촌 큰아버지네 집에라도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고 간청했다. 그래서 다음날 깊은 밤, 엄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훈춘에 있는 외가큰아버지 집을 찾아갔다.
- 북송을 네 번이나 당했던데. 2000년에 혼자 북송되어 새별군감옥에 20일간 수감되었다. 이후 재탈북해 중국서 살던 중 엄마와 함께 2002년 2차 북송되었다. 엄마는 새별군감옥서 사망했다. 3개월 복역, 이후 다시 탈북 아쉽게도 2004년 3차 북송되어 청진집결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네 번째 탈북,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에 4차 북송되어 회령 전거리교화소에서 2년 3개월간 복역을 하였다. 다섯 번 만에 2012년 10월 한국으로 왔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서울에 북한인권박물관 건립이다. 문제는 한국은 5년마다 혹은 그 이전이라도 선거로 정부가 바뀐다. 보수·진보 정권마다 대북 및 탈북민 정책이 다르다. 그러니 북한문제는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순수 민간단체나 기업과 개인의 후원으로 ‘북한인권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북한의 참혹한 역사를 바로 기록하자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소리도 있지 않는가. 꼭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후대들은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역사를 바로 공부하고 알아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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