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반드시 열려야 할 길”...평화통일 정책 토대 다지는 데 주력[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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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원 이범석 장관 |
이범석 통일원장관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 다음날인 1980년 9월 2일 부임해 1982년 1월 3일까지 재임했다. 그는 1981년 4월 7일부터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총장을 겸직하며 통일정책의 실천적 전환을 추진했다.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한 경험
바탕으로 ‘통일원은 연구하는 부처가
아니라 행동하는 부처가 돼야한다’ 강조
이 장관은 취임 직후 “이 자리를 천직으로 알고 일하겠다”며 “통일의 기반을 잡아놓고야 물러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과거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통일원은 연구하는 부처가 아니라 행동하는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80년 10월부터 전국 30개 지역에서 열린 지역 통일꾼대회에 직접 참석하며 국민적 통일 의식 확산에 앞장섰다. 같은 해 11월 11일 진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서부경남 통일꾼대회에서 이 장관은 “새 헌법에는 평화통일 의지가 전문을 포함해 다섯 곳에 명시돼 있다”며 “정부의 확고한 통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통일원의 사명을 “한반도 재통일을 위한 평화통일 기반 조성”으로 규정하고, “통일은 국제정세 속에서 여건이 무르익어야 가능하다며 인내와 긴 안목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남북대결은 사이가 나쁜 이웃집과 같다”며 “북한도 언젠가는 적화통일의 망상에서 깨어나 화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 11월 3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그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통일원이 중심이 되어 관계 기관과 전문가, 국민 여론을 종합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열라”는 지시를 받았다.이 지시는 이후 1981년 1월 12일 발표된 ‘1·12 대북제의’로 구체화됐다.
당시 전 대통령은 이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한 평화통일 방안 모색, ▲남북 정상의 상호 지역 방문을 북측에 제의했다. 이 장관은 후속 추진 계획을 마련했으나, 남북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임기 내내 “통일의 길은 멀지만 반드시 열려야 할 길”이라며 평화통일 정책의 토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장관은 ‘1.12제의’ 홍보를 적극적으로 했다. 외빈을 만난 자리에서 이 제의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절차나 과정 논의할
실무접촉이나 회담 준비...통일원이
즉각적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남북대화사무 통일원 장관으로 이관
“이 제안은 조국의 분단역사에서 누가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성실하게 민족양심에 입각해 노력했는가의 역사적 기록이 될 것이다. 이 같은 분단 조국사서 획기적인 역사적 제의를 김일성이 거절한다면 후에 역사를 기술할 역사가들한테 규탄을 받을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양심에 입각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관은 남북간에 정상회담의 유용성을 처음으로 주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상회담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 이범석 장관 |
“동·서독의 경우는 브란트-슈토프 회담에 이어 양측의 접촉이 각료 레벨로 낮아져 그 결실로 72년의 양독간 기본조약이 맺어졌다. ‘1·12제의’가 동·서독이 밟은 길처럼 남북 사이의 긴장완화와 전쟁방지, 나아가서는 평화통일에 이르기까지 승화되기를 기대한다.”
이 장관은 남북정상회담 절차나 과정을 논의할 실무접촉이나 회담도 준비해두었다. 당시 전 대통령은 통일원이 즉각적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남북대화사무를 중앙정보부장의 권한에서 통일원장관의 것으로 정식 이관토록 조치했다.
이 장관은 1월 14일 대북성명을 발표하여 남북한 최고당국자의 상호방문을 실현하기 위한 절차를 협의를 위한 접촉을 제의했으나, 북측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북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장관은 1981년 4월 10일 전북도지역 통일꾼 4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주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초청강연회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일은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동족상잔 비극 막기 위한 필연적 과제
통일 여건 마련되면 활용할 수 있도록
통일문제 논의 적극적으로 활성화해야
“통일은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한 필연적 과제다. 따라서 통일 여건이 마련되면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통일문제 논의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
1981년 6월 3일 대통령의 ‘평화통일의무’수행에 고문역을 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제1차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장관은 평통 사무총장으로서 9천명에 이르는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데 앞장섰다. 지역대표와 선거인, 직능대표, 해외동포 등 국민 각계각층이 통일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내고 주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남북한 어느 쪽이 민족을 대표하느냐고 물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의 통일문제가 안고 있는 특수사정으로 ▲남북한은 동서독과는 달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며 ▲동서독 간에는 교류와 협력이 폭넒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남북한 간에는 대화의 단절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남북한 간에는 민족적 화합문제에 전혀 진전이 없으나 동서독 간에는 사실상 전쟁의 포기, 협력을 통해 민족학합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이다.”
이 장관은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해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북한 내부적으로는 김정일을 2인자로 하는 후계체제를 굳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1982년 1월 3일 이범석 통일원장관은 물러나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1982년 6월 2일 외무부장관이 됐다.
[장관의 통일 철학]
질문 : 통일의 당위성은 무엇인가?대답 :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분단할 이유가 없다.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고, 제한된 국토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동북아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질문 :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여건은?대답 : “국내 상황뿐 아니라 북한의 내부사정과 국제환경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야 한다.”
질문 : 통일여건 조성을 위한 과제는?대답 : “국력을 키우고 이를 조직화하며, 국제사회에서 지지기반을 넓혀야 한다.”
질문 : 통일 전망은?대답 : “남북 간 국력 격차와 국제정세를 볼 때, 10년 전보다 여건은 분명히 나아졌다.”
질문 : 이 시점 남북관계는 나빠 보이는데?대답 : “우리는 인내와 성의로 평화통일을 추진했지만, 북한의 무성의로 7·4공동성명 이전처럼 교착상태에 있다.”
질문 : 북한의 무성의와 내부사정은 관련이 있나?대답 : “식량난과 외채 문제로 경제가 어려우며, 정치적으로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질문 : 분단으로 인한 이질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대답 : “학자, 예술가, 스포츠, 이산가족 교류를 확대해 신뢰를 쌓아야 한다. 통일은 단순한 행정 통합이 아니라 사회·정신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내면적 통일이어야 한다.”
질문 : 통일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대답 :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 공산주의의 허구와 통치의 비리, 무리를 국민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질문 : 남북대화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대답 : “국력을 강화하고 이를 조직화해 국민 생활을 향상하고, 그 힘으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인물 약력]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범석은 1942년 북한 제2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대학 예과(법정학)를 중퇴한 뒤 1946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영문학 석사(1961),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석사(1963)를 취득했다.
외무부 국제기구과장, 주유엔대표부 및 주미대사관 참사관, 외무부 의전실장 등을 거쳤으며, 1970년 튀니지대사, 1972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겸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 1976년 인도대사로 재직했다. 1980년 통일원 장관과 평통 사무총장, 1982년 대통령비서실장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한국전 휴전 회담 포로교환 때 우리 측 대표로 활약했으며, 납북인사 명단 확보(1957)와 재일동포 북송 반대 교섭(1959)에 기여했다.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로 4차례 평양을 방문했으며, 인도대사 시절에는 사이공 억류 외교관 송환과 뉴델리 대사관 대대적인 신축을 주도했다.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에서 전 대통령을 수행 중 북한 공작원의 폭탄테러로 순국했다. 키 183cm의 당당한 체구와 세련된 외모,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화술로 정평이 났다.
![]() 이범석 적십자회담 수석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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