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의견은 달랐지만, 대화로 해결· 평화통일 공세 펴는 것은 같았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박정희 정부의 70년대 정책 ‘전기’ ⑦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10/23 [20:03]

남북의 의견은 달랐지만, 대화로 해결· 평화통일 공세 펴는 것은 같았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박정희 정부의 70년대 정책 ‘전기’ ⑦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10/23 [20:03]

박정희 정부의 70년대 통일정책은 전기와 후기로 대별할 수 있다. 전기는 유신 이전의 제3공화국 말기의 통일정책이며, 후기는 유신헌법 하 제4공화국의 통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의 70년대 전기 통일정책은 1970년부터 유신헌법 공포된 197210월까지 약 3년간이다.

 

박 대통령은 1970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

 

유엔에서 한국문제 함께 토의해서

두 체제, 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으로 국민이 선택하도록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전기 때는 평화통일정책의 본격적인 추진기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선건설 후통일로 향상된 실력을 토대로 통일정책에서 신축적이면서 적극적으로 나아간 시기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긴장완화,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급격히 형성될 때였다.

 

우방국 미국의 닉슨독트린 등 전 과 다른 방향전환은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주었고, 휴전선 너머 북한도 중국공산당이 움직임에 귀추를 주목하며 추종하는 시기였다.

 

우리정부의 통일정책은 197019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 방향이 나왔다. 박대통령은 자신감을 피력했지만, 아직 선()건설이 끝나지 않았다며 통일문제의 주도권을 70년대 말에 잡을 뜻을 밝혔다. 기자회견 내용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났다.


“70년대 말에 가면,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소위 조국근대화 작업은 일단 매듭을 짓게 됩니다. 기타 모든 분야에 있어서 통일에 대한 고지를 우리가 먼저 전부 점령해 버리게 되면, 그 다음부터 통일문제는 우리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 70년대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고 나의 전망입니다.”

 

박 대통령은 1970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서 우리 정부는 북한이 군사도발과 대한민국 전복 행위를 그만두면, 남북 간에 인위적 장벽을 제거해 나갈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하면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함께 토의해서 두 체제, 즉 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것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으로 국민이 선택하도록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의 평화통일구상 선언에

나름의 대화 신호인 평화통일 공세

북한의 허담 외교부장은 19714

최고인민회의 보고서 현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 촉진시킬 데 대하여

보고 통해 8개항의 평화통일방안 제의

 

북한은 박 대통령의 평화통일구상 선언에 나름의 대화 신호인 평화통일 공세를 폈다. 북한의 허담 외교부장은 1971412일 최고인민회의 보고에서 현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촉진시킬 데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8개항의 평화통일방안을 제의했다.

 

첫째, 주한미군 철수, 둘째, 미군철수 후 남북군대 10만 명 이하로 감축, 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및 한일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폐기, 넷째, 미군철수 후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기초 위에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로 통일된 중앙정부 수립, 다섯째, 남북한 전 지역에서 정치활동의 완전한 자유보장 및 투옥된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 여섯째, 통일에 앞서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 실시, 일곱째, 남북대표로 구성되는 경제위원회를 조직, 남북 간의 경제교류, 과학, 문화, 예술, 체육의 교류, 서신왕래 및 인사교류, 여덟째,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종전부터 북한이 주장해온 것을 전부 망라한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거부하면서 통일에 관해서는 유엔의 책임과 원칙을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남북의 의견은 달랐지만, 서로 대화로 해결하자는 것, 평화통일 공세를 펴는 것은 같았다.

 

김일성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19718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르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대회에서 우리측을 향해 나라의 통일을 원한다면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 민주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기존 대남 강경노선을 벗어나 우리 집권 여당과 대화할 용의를 표명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대화제의를 수용, 당국 차원에서 가장 이견이 없을 인도주의 문제, 즉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 문제 논의를 제의키로 했다.

 

19718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한적십자사에 적십자회담을 제안했고 북측이 814일 평양방송을 통해 수락했다. 분단 26년 만에, 6.25전쟁이 끝난 지 18년 만이었다.

 

남북대화가 열릴 무렵인 1971815일 박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구체적 노력과 자주적 결단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북한이 우리의 평화통일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하면서 평화통일을 위한 대화의 광장은 언제나 마련할 수 있음을 재천명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이 무력과 폭력 포기하고 진지한

자세로 나온다면 평화통일위한 대화의

광장은 언제든 마련될 수 있을 것 확언

 

한반도의 장래에 관한 문제는 열강이나 국제조류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노력과 자주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

 

북한이 종전의 호전적 정책과 교조(敎條) 문화적 작풍을 깨끗이 버리고 국제적인 새 물결 속에 혼연히 뛰어 들어올 수 있다면 이는 세계평화를 구축하는 일대 전기가 될 것은 물론이요, 한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일대 서광이 될 것이다.”

 

북한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의 평화통일 제의를 하루속히 수락하고 무력과 폭력을 포기할 것을 거듭 촉구하며 평화통일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의 길임을 다시 한번 내외에 천명하는 바이다.”

 

북한이 무력과 폭력을 포기하고 진지한 자세로 나온다면 평화통일을 위한 대화의 광장은 언제든지 마련될 수 있을 것임을 확언해 둔다.”

 

이어 831일 김용식 외무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인도적 문제의 해결 비정치적 문제의 해결 정치적 문제의 해결 3단계론을 제시했다.

 

1971820일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을 필두로 920일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시작하고, 1972829일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서울-평양을 오가며 열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회담은 순조롭지 않았다. 북측이 반공법과 보안법 폐지부터 요구하면서 3개월간 9차례의 회담을 했으나 언쟁만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높은 급에서 실질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에 따라 비선 접촉을 제의했고, 북측이 수락해 중앙정보부-조선노동당 비밀회담이 열렸다.

 

19711120일부터 남측 정홍진, 북측 김덕현 간 비밀 실무접촉이 열렸고 1972419일 북측 김덕현이 서울을 방문했다. 여기서 서로 대화를 한 끝에 이후락 중정 부장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간 채널이 열렸다.

 

남북은 비방 중상을 하지 않기로 한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197211

11일부터 대남, 대북방송과 군사분계선

상의 확성기에 의한 대남, 대북 방송

상대측 지역에 대한 삐라 살포를 중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이 남북을 교환 방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52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고 7410시에 서울과 평양에서 7개항으로 된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서울에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서는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리하여 박성철 부수상이 나섰다.

 

주요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 상호 비방, 중상 중지 및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를 위한 적극적 조치 남북간 다방면적 교류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성사 적극 협조 서울-평양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운영 제반 합의사항의 성실한 이행 약속이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북한 부수상

 

특이했던 것은 첫 번째 조국통일 3대원칙은 북측이 평소에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우리측이 뜻밖에도 북한이 하자는 대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받아들인 일이었다. 국내 정치적으로 남북 사이 합의를 성과로 내세워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21012일에 남북조절위 제1차 공동위원장회의가 있었고, 112일에는 남북조절위 제2차 공동위원장회의(평양)가 열려 공동 발표문을 내놓았다. 1130일에는 남북조절위 제3차 공동위원장회의 및 제1차 본회담이 열렸다.

 

남북은 비방 중상을 하지 않기로 한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19721111일부터 대남, 대북 방송과 군사분계선 상의 확성기에 의한 대남, 대북 방송, 상대측 지역에 대한 삐라 살포를 중단했다.

 

남북한이 197274일 통일정부에 이르는 원칙에 합의하고 긴장완화 조치를 취하며, 다방면적 교류를 하기로 하자, 서방의 일부 나라들은 이것을 사실상의 남북간 상호 인정, 평화공존으로 판단했다.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대화로 문제를 푼다는 것 자체가 상호 인정 아니냐는 것이다. 그 결과, 서방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가 1973년에 북한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731121일 역할을 다한 언커크가 해체됐다.

 

박정희 정부의 70년대 후기 통일정책을 보면,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197210월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9791026일까지라고 할 수 있다. 7년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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