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 시작과 정부의 위기...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에 무산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김영삼 정부 ‘성과의 구조적 한계’ ⑫ 上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6/04/22 [18:45]

북핵문제 시작과 정부의 위기...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에 무산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김영삼 정부 ‘성과의 구조적 한계’ ⑫ 上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6/04/22 [18:45]

 김영삼 대통령

 

많은 일을 했지만, 성과를 내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컸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직전 노태우 정부가 기본합의서 채택과 북방외교 등으로 남북관계의 대전환을 이끌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직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김영삼 정부는 이전 정부가 남긴 것도 있고 돌발적이었던 당시 남북관계와 미·북 관계, 북핵문제로 고충이 많았지만, 주변 정세 또한 좋지 않았다. 많은 일들이 생기고 협의하였지만,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되는 불운까지 겹치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주민 기아사태 직면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유례없는 경제난과 흉작이 겹치며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에 돌입했다. 1994년부터 조짐을 보였던 배급체계의 붕괴는 1995년 홍수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북한 기근의 근본적 원인이 단순한 자연재해에만 있지 않았다. 1980년대 말부터 이어진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우호 가격(사회주의 국가 간 특혜 가격)’ 체계를 무너뜨렸다. 저가 석유공급이 중단되자 비료생산이 멈췄고, 이는 곧 농작물 수확 급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떡 주고 뺨 맞은청진항 태극기 하강 사건

 

19956, 베이징 남북 쌀 회담에서 북측 단장 전금철은 남루한 차림으로 나타나 우리측에 쌀 지원을 통사정했다. 우리 정부는 동포애를 바탕으로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쌀을 실은 우리 측 선박이 북한 청진항에 들어갔을 때는 회담할 때의 분위기와 달리 현장 관리자의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우리 국적선 씨아팩스호에 게양된 태극기를 강제로 내리게 하고 인공기를 달도록 위협한 것이다. 이는 베이징 회담 당시 선미의 태극기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 구두 양해를 정면으로 위반한 도발이었다. 격분한 우리 정부는 쌀 수송선을 회항시키고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섰다.

 

반복되는 비우호적 태도에 남북관계 냉각

 

북한은 사과 전문을 보냈으나 이후에도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 8, 쌀을 싣고 간 삼선비너스호선원을 정탐 혐의로 일주일간 억류하며 남북 관계를 다시 얼어붙게 했다.

 

해주에 비료를 전달하러 간 우리 측 요원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감시와 검열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등 상식 밖의 행동도 이어졌다. 당시 전문가들은 인도적 차원의 온정을 베풀수록 오히려 북측의 무례한 태도로 정부의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분석했다.

 

결국 정부는 쌀 15만 톤 지원을 끝으로 수송을 중단했다. 이 시기의 사건들은 대북 지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소적 여론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한발로 이어지는 대형 사건들

 

북한은 식량 위기 속에서 남쪽으로 잠수정을 보냈다가 발각됐다. 이 잠수정은 1996915일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려다 18일 좌초됐다. 북한은 침투를 부인하고 잠수정이 훈련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에 시인, 사과를 요구하면서 침투를 시인할 때까지 일방적이거나 시혜적인 대북지원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정부차원의 인도적인 대북 지원을 중단했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침투 시인, 사과 요구에 대해 처음에는 보복을 다짐하는 등 반발했으나, 결국은 우리의 확고한 입장에 굴복해 19961229일 방송으로 북한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발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우리 정부는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북한의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비서의 망명사건이 일어났다. 1997212일 역대 귀순자 중 북한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북한의 비참한 실정이 김 부자의 세습체제에 의한 독재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에 온 이유는 말이 통할 것 같으니 함께 힘을 합쳐 북한주민을 구제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갈하기를 인민이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했다.

 

북핵문제 본격화... 김영삼 정부의 위기

 

김영삼 정부 들어 가장 큰 이슈는 북핵문제였다. 노태우 정부 말기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와의 갈등이 김영삼 정부 들어 활활 타올랐다.

 

북한은 1992년 처음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고 핵 관련 현황을 제출하는 등 국제 협의에 비교적 순조롭게 응했다.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 등 IAEA 대표단도 이를 검증하기 위해 방북했으며, 초기에는 긍정적 결과가 기대됐다.

 

그러나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이를 거부했고, 19932IAEA는 특별사찰 촉구 결의를 채택했다. 이때부터 북핵문제가 본격화되며 막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북한은 같은 해 3월 준전시(準戰侍) 상태를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국제 핵체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공조해 북한에 탈퇴 철회를 촉구했으며, 남북간 경제협력은 자연히 북한의 NPT 탈퇴 철회 및 핵사찰 문제 해결 이후로 미뤘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국제사회가 잇따라 사찰 수용을 요구하는 가운데,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와 북한의 강석주 간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북한은 NPT 탈퇴 발효 하루 전인 1993610일에 탈퇴를 유보한다고 발표했지만, IAEA 사찰에는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며 미국과의 직접 협상만을 고집했다.

 

111일에 IAEA의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은 유엔총회에서 IAEA와 북한간 협상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선언하고 유엔총회는 북한의 핵사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김 대통령은 나름대로 북핵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 영향을 주리란 기대를 안고 김일성이 원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1993319일 북한으로 보내줬다. 그러나 북한은 기대와 달리 북핵문제 해결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북한은 남북대화에서 핵문제 논의를 회피하고 1994319일 제8차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결국 북한은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 협상하는 통미봉남전략으로 나섰고,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1994년 들어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사용 후 핵연료를 추출하며 플루토늄 확보에 나서자,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은 군사적 타격까지 검토했고,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감이 확산됐다. 이른바 1993~1994년의 제1차 북핵 위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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