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 시베리아 벌판의 농노들 <7>

러시아 조문객에 종자돼지 잡아 술상 마련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5/06/12 [16:25]

[탈북수기] 시베리아 벌판의 농노들 <7>

러시아 조문객에 종자돼지 잡아 술상 마련

통일신문 | 입력 : 2015/06/12 [16:25]

통곡은 고사하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내가 두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다. 묵도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런 눈물의 흔적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전기사가 더 큰 소리로 목 놓아 울기 시작하자 왠지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며 소름이 끼쳤다.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의 통곡은 충신의 마음을 과시하는 일종의 연극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울어댔지만 대부분 진심이 감춰진 스팩터클이나 매한가지였다.
 
통곡으로 충신 열도와 객기 보여
 
‘잘도 놀고 있군.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조속한 그의 행동에 속으로는 비열한 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한편으론 그를 이해해야 했다. 그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당원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순간을 놓치면 자신의 충성심을 화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누가 뭐라든 어떻게든 충신의 열도와 객기를 보여줘야 그는 입당 할 수 있는 여지를 강하게 남길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처지가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내 경우라면 저런 연극을 놀지 못할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울기를 몹시도 싫어하던 나는 이런 경우 때마다 그게 흠이었다.
어찌 보면 천성일지도 모르지만 남이 울 때는 상황에 따라 눈물 자국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게 되질 않았다. 내가 러시아에서 생활한지 1년이 지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에 찾아가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이 몹시 꾸중을 하셨지만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하고는 먼저 가버린 아버지가 야속하다며 도리어 어머님께 행패 질을 했다. 그런데 김일성이 뭐란 말인가.
내 마음속에 김일성이 떠나 간지는 벌써 오래전부터다. 웬만큼 권력 있는 상위권에서 활동하는 북한 사람이라면 북한을 세상에 가장 무서운 독재세상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일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특별하게 나는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이런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옛날에는 철저한 국가기밀로 되어있던 김일성에 대한 실화들이 러시아 신문지상에 공개 되군 했다.
 
애도의 마음 담은 방명록 만들어야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말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기사도 직접 읽었다.
당시 스탈린 정권이 파견한 고려인 장교들에게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며 북한정권의 초대 수상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두 신문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지만 이런 사실을 발설했다가는 어느 순간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자신을 억제하군 했다. 몰라야 하는 사실을 아는 자체가 곧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런 충격적인 사실들을 러시아어 원문 기사에서 읽으면서 수령님에 대한 배신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교육받아 온 수령님의 위대한 역사가 모두 왜곡된 거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그런 기회를 접할 때마다 ‘수령님’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울기는 왜 운단 말인가.
도리어 90살도 채 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사라진 그에게 감지덕지하다고 침을 뱉는 것이 더 속이 시원하리라.
그렇게 다양한 희극과 연극을 연출하며 추도식이 끝나고 농장으로 돌아오자 내 업무는 더 바빠졌다. 이번에는 농장으로 찾아오는 러시아 조문객들과 매일 밀주를 마셔야 했다.
그들에게 술을 한잔이라도 더 마시게 해서 돌아가신 ‘주체 조선의 영장’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담은 방명록을 만들어 내야했다.
인근 러시아 마을들 북한농장을 찾아가 김일성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면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술주정뱅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몇 시간씩 취하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취기에 아무렇게나 놀려대는 횡설수설을 그럴듯하게 ‘번역’하여 방명록을 만들고 거기에 사인을 남기도록 아양을 떨었다.
그러다 술이 모자라면 시장에서 싼값의 밀주를 대량 구입해 놓고 손님접대를 계속했다. 변변한 안주가 없다며 러시아 주정꾼들이 짜증을 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애지중지 키우던 종자돼지까지 모조리 잡아 진부한 술상을 마련하기도 했다. 어제는 갓 태어난 돼지새끼가 그대로 곰탕이 되어 가난한 농군의 안주상에 통째로 오르더니 오늘은 러시아 술주정꾼들에게 그 어미가 안주로 올랐다.
 이영일 러시아북한농잘 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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