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자유'를 찾아가는 길 (2)

통일지기 | 기사입력 2001/11/21 [11:47]

[르포]'자유'를 찾아가는 길 (2)

통일지기 | 입력 : 2001/11/21 [11:47]
길림성 연변자치주 황청현 석촌은 1970년대의 말부터 시작된 등소평(鄧小平)의 개방, 개혁 정책으로 인민공사(집단농업화)로부터 세대당 도급제로 전환한 때로부터 농업생산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지만 평원지역과 비하면 아직도 10년은 뒤떨어져 있었다.
왕청현 석촌에는 아직도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농사도 소가 없으면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60년대의 북한의 농촌의 낙후한 모습이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먹을 것은 풍부하여 배 고를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일은 매우 고역스러웠다.
온종일 힘든 일에 시달리다 어둠이 지기 시작하는 저녁 8경이면 지친 몸을 끌고 오두막에 들어서는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변상호씨는 이 오두막집을 보고 '쓰러져 가는 꽃분이의 집'이라고 했다.
꽃분이란 북한의 유명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일제통치하에서 지주집 머슴으로 사는 꽃분이의 집은 가난의 대명사로 되어 북한에서는 아주 가난한 사람의 집을 '꽃분이의 집'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극에서나 보았던 '꽃분이의 집'에서 자신이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는데 그것도 보다 나은 삶을 목표해 달려온 이국땅에서 이런 집에서 홀로 숨어살게 되었으니 울분과 괴로움으로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주인집에서 낡은 녹음기를 발견하고 주인집의 허가를 받고 이것을 오두막에 가지고 왔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이다가 갑자기 한국방송이 잡히게 되었다.
KBS 사회교육방송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방송하고 있었다.
(야, 이게 무슨 소리야, 김정일을 막 욕하고 있구나, 일생 처음 듣는 소리구나!)
그날부터 그에게는 하나의 간절하고 충만된 기다림이 생겼다.
남한방송과 남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고 행복으로 됐다.
폐쇄된 병영식 전체주의 하에서 수령우상화에만 침식되어 왜곡된 역사와 선전에 속아 맹인처럼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는 밤이면 KBS 방송을 벗삼아 세상물정을 다시 보게 되었고 북한의 공산체제에 대하여 역증을 느꼈으며 그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의 개방, 개혁의 핵심적 역할을 한 남방의 경제특구 선전시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어 봤자 뭐 얻을게 하나도 없다, 중국말은 잘 모르지만 중국에서 가장 발전되었다는 선전에 나가면 앞으로 진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주인집에 사정이야기를 하고 얼마간의 여비를 받은 다음 무작정 남방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북한과는 달리 중국의 열차 안에서는 여행증이나 주민등록증 검열은 전혀 없고 차표만 찍으면 그만 이었다. 혹시 공안에게 잡히지 않을까 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3일간 열차는 남방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지만 그는 긴장되어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
길림성 연길시를 출발한 열차는 옹근 3일만에 선전에 도착하였다.
역을 빠져 나오기 바쁘게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선전 송강교회로 달려가 은신처를 부탁했다.
그는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란 무엇이며 북한에서 그토록 미워하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선경책을 몇번이고 읽어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인자하고 선량하신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악재와 시련을 극복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데 과연 나도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가?
그날은 과연 언제 일가?)
목사님은 독실한 신자, 그리스챤이 되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여 언젠가는 희망하던 것을 꼭 소원성취 할 수 있으니 열심히 기도하라고 간곡히 말하곤 했다.
허지만 교회에서 숙식하자면 1개월에 인민페 220원을 내야하는데 그 돈을 마련하자니 일감을 잡아야 했다. 교인들의 주선으로 이불솜을 틔우는 자그마한 '완구즈창'의 노동자로 월급 800원을 받기로 계약하고 일하기 시작했다.
남방의 날씨는 몹시 무더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 속의 밀폐된 공간에서 악취를 마시며 솜을 틔운다는 것은 아득한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노예들의 일터 그대로였다.
일을 끝내고 저녁에 교회로 들어오면 전도사님은 5시간동안이나 선경공부를 시켰는데 이 또한 못할 일이었다.
온 종일 일에 지쳐 피곤한데다 공부를 시키니 짜증나고 믿음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이 공부가 너무나 싫어 일이 끝나면 교회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씨 고운 한 조선족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완구즈창'에서의 솜 틔우는 일도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그만 두고 의지가지 할 곳이 없으니 다시 송강교회에 들어가니 뜻밖에도 몇 년전에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김철웅씨를 만나게 되었다. 수천, 수만리 이국땅에서 한 고향의 동포를 만나니 넘치는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야자수 그늘아래서 떠나온 고향산천과 부모,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에 한잔 술에 북받치는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다.
"철웅아, 우리 이게 무슨 꼴이야, 죽도록 일을 해도 북한놈이라고 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그렇다고 맞서면 고발하겠다지, 억울해 살겠니?
이 떼놈새끼들(중국인들을 이르는 말)의 속에서는 하루도 못 살겠다.
김일성이 말하기를 나라 없는 백성은 산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지금 그런 꼴이 되었구나. 고향에 다시 가고파 미칠 지경이다."
"형님, 무슨 그렇게 나약한 소리하오, 우리가 고향을 등진게 사람이나 형제가 보기 싫어서 떠났소, 김정일이 밉고, 천대와 굶주림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시 고향에 찾아가면 민족반역자라고 그날로 목을 매달게요. 그래도 북조선보다야 중국이 한참 낫지. 아이요?
우리 눈을 질끈 감고 참기요, 그러느라면 좋은 날이 꼭 있을 게요."
이들은 서로를 달래고 의지하며 기나긴 남방의 여름을 힘겹게 이기려 했으나 확실하게 발붙이고 일 할 곳도 없었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물건들이 이들의 눈에는 풍년이었으나 손에는 흉년이었다.
한민족인 한국인과 중국인이 합작하여 만든 '사출기 합영회사'에서도 일해 봤으나 이곳에서도 중국인들 월급의 3/1도 주지 않아 이들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보다는 한국인 사장이 같은 동포라고 크게 도와주리라 기대했건만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니 손맥이 풀리는 것이다.
(중국인들도 벌어먹기 힘들어하는 남방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조선족이 많은 동북이 말도 통하고 생활풍습도 맞고 기회도 있을 것이다. 다시 연변으로 가자!)
떠나가자니 여비가 없었다. 적어도 1000원은 마련해야 되는데 그만한 돈을 꿔 주겠다는 이가 없어 한숨만 쉬던 어느날 돈을 꿔주겠다는 귀인을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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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수 연풍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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