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바로알기 40. 조선로동당 ‘최고 지도기관’ 구조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0/10/04 [13:25]

북한바로알기 40. 조선로동당 ‘최고 지도기관’ 구조

통일신문 | 입력 : 2010/10/04 [13:25]

당 대표자회는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소집

 

정상화│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당 대표자회는 당 대회와 다음 당 대회 사이에

전당(全黨)적으로 토의하고 해결해야 할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당 대표자들을 소집하는

임시 정당대회 성격의 회의

 

 

북한은 당이 통치하는 국가이며 각급 당의 지도기관은 당 대회, 당 대표자회, 그리고 당 대표회로 불리는 당원들의 회의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지난 6월 발표한 당 대표자회 9월 상순 개최는 별 설명도 없이 일단 무산됐다. 원인으로 김정은 후계승계를 둘러싼 내부 갈등설과 태풍 곤파스로 인한 수해 및 그로 인한 분위기 저하설 등이 나돈다.

당 대표자회는 명칭이 비슷한 당 대회 및 당 대표회와 혼동이 되곤 한다. 지난 지면(8월 27일자)에서 당 대회와 당 대표자의 차이를 간략히 설명한 바 있다. 이번 기회에 명칭이 비슷한 당 대회, 당 대표자회 및 당 대표회의 차이를 상술하고자 한다. 우선, 위상과 기능을 보면, 당 대회는 조선로동당 최고 지도기관으로 당과 혁명사업에 관한 가장 중대한 전략과 정책을 토의하고 결정한다.

당 대표자회는 당 대회와 다음 당 대회 사이 기간에 전당(全黨)적으로 토의하고 해결해야 할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당 대표자들을 소집해 갖는 임시 정당대회 성격의 회의다. 그 위상은 당 대회와 동일하며 더 낮은 지위는 결코 아니다.

당 대표회는 도(직할시)·시(구역)·군 혹은 이와 동등한 권한을 지닌 기관이나 사업소 당 조직의 최고 지도기관이다. 이번에 김정일은 행정구역이 아닌 인민군 당 대표회에서 당 대표자회 대표의 하나로 선출된 바 있다. 간략히 말해 당 대표회는 중앙 수준에서의 당 대표자회가 갖는 위상과 기능을 지방 수준에서 갖는 회의의 총칭이라고 간주하면 된다. 지방 행정단위의 급에 따라 도(직할시), 시(구역) 및 군 그리고 이에 상당하는 조직은 각기의 당 대회를 갖는다. 가장 기초가 되는 산하 조직인 당 세포 혹은 초급당의 회의는 총회로 불린다. 모든 당 대표회의 기능은, 해당 당 위원회 및 검사 위원회의 사업을 보고받고 토의하며 승인하는 것과 당 및 검사 위원회 위원 그리고 상위 당 대표(자)회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당 대회, 당 대표자회 및 당 대표회의 조직과 연혁을 보면, 당 대회는 5년 마다 개최되는 정기대회와 당 중앙위원회 혹은 당원 1/3 이상의 제의에 의해 열리는 임시대회가 있다. 정기대회 소집기간은 1970년까지는 4년이었으나 1980년 6차 당 대회에서 5년으로 바뀌었다. 당 대회 참가 대표자의 비율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결정하는데, 1980년의 경우 당원 1천 명당 결의권 대표자 1명 그리고 후보당원 1천 명당 발언권 대표자 1명이었다.

주요 당 대회를 보면, 1946년 제1차 당 창립대회와 1948년 제2차 당 대회는 국가 건설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뤘다. 1956년 제3차 대회는 경제발전과 공산주의 사회 건설 완성을 목표로 했으며, 1961년 제4차 대회는 당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 혁명 전술이 주요 안건이었다. 1970년 제5차 대회는 김일성 개인 권력의 강화가 핵심이었으며, 1980년 제6차 대회에서는 주체사상을 당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하고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사라지는 대신 아들인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 그리고 이후 30년이 넘도록 소집되지 않았다.

비정기적인 당 대표자회는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소집되며, 그 참가 대표는 동 위원회가 규정한 비율과 절차에 따라 도(직할시)급 당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출된다. 당 대표자회의 결정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비준을 받아 효력을 발휘하나,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의 보선 혹은 선출 즉, 인사 사안은 그럴 필요가 없다.

1958년 제1차 당 대표자회는 사회주의 경제 완성의 보고와 반 김일성 인사의 숙청을 위한 조직 개편이 있었다. 1966년 제2차이자 마지막으로 개최된 대표자회는 2010년 9월 초 열릴 예정이었던 당 대표자회와 여러모로 유사점이 많은 회의였다. 44년 전의 대표자회는 연기됐지만 조만간 개최될 올해 대표자회의 배경과 성격을 이해할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는 양적 경제개발전략(extensive economic development strategy)이 한계를 보임에 따라 7개년 계획이 실패해 경제가 어렵고 주민 생활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또한 베트남전이 치열해지자 경제·국방 병진 전략을 택하며 친중 노선에서 친소노선으로 동맹관계를 조정하던 때라 지도부의 내부 갈등과 권력 개편이 예상되던 때였다. 이 회의에서는 결국 김일성의 권력 사유화를 반대하던 인사 및 친중국파 인사가 대규모로 숙청됐다. 2차 당 대표자회가 열린 1966년 10월은 1961년 9월 제4차 당 대회로부터 5년이 경과한 시기다. 마땅히 제5차 당 대회가 열렸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 당 대표자회가 열렸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을 뿐더러 외교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권력개편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다른 국가의 공산당 대표를 초대해야 하는 당 대회를 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현재 경제난에 처하고 3남 정은에게로의 후계승계를 위해 권력구조를 개편해야 하는 북한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북한을 통치하는 노동당 권력의 핵심은 초기 당 대회와 당 중앙위원회에서 1956년 제3차 당 대회 이후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그리고 1966년 당 중앙위원회에 비서국이 신설되면서 비서국이 이에 가세하고, 1980년 제6차 당 대회 이후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거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로 이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김일성, 김일, 최현, 오진우가 상무위원이었으나 모두 사망하고 현재는 김정일만이 유일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이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9명의 상무위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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