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서열 파괴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03/03/08 [11:04]

[모란봉] 서열 파괴

통일신문 | 입력 : 2003/03/08 [11:04]
박 신호(방송작가)

새 해가 되면 낡은 수첩에서 새 수첩으로 이름이 옮겨진다.
매년 해 오는 일이건만 해가 갈수록 탈락자가 생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사람이 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화 통화도 줄어든다.
얘기도 짧아진다.
새로운 화제가 좁아지니 할 얘기도 별로 없다.
그런 사람끼리 만나보아야 역시 낡은 유성기를 틀어 놓고 있는 격이다.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들의 공통점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새로 나온 책 목록을 봐도 골라 볼 만한 것이 점점 좁혀진다.
세상 뜯어 고쳐야 한다는 책이 나오면 제목으로 끝이다.
오히려 명상에 잠기게 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해 주는 내용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지도 바뀐다.
시끌시끌한 곳이 싫어져서 차라리 한적한 곳을 찾는다.
해돋이나 노을을 봐도 감탄사가 나오기보다 조용히 빨려들고 빠져버리기 일쑤다.

친구들이 불러 내 조촐한 7순 생일을 보내는 자리에 후배가 건방을 떤다.

"하늘같았던 선배님도 이제 저와 비슷해졌습니다.
제가 5년 후배지만 친구 같습니다."
죽는 서열이 없어진 나이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선배는 섭섭해 하다가 미소로 덮어간다.
하기사 한 살과 두 살 차이가 엄청날 때가 있다.
한 살짜리 동생이 있는 형이 두 살이면 비록 나이 차이는 한 살 차이지만 갑절이나 더 나이를 먹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한 살 차이란 게 느낄 수 없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섯 살 많은 대선배도 나이 70이 되면 다섯 살 아래 후배와 터놓고는 지내지 못해도 흉허물 없어져 가는 것이 정상인지 모른다.

학창 시절 반장들은 공부를 잘 했다.
모범생이었다.
부러운 대상이다.
그러나 10년, 20년, 30년 지나고 보면 사라진다.
학습 등수와 관계없이 출세하기 때문이다.
그랬다고 반장하던 학우가 이민을 가지는 않는다.
속으로는 "나도 저 친구처럼 공부는 적당히 하고 놀았었으면~"한다.

골프를 친다.
점수가 나오는 게임이니 누가 더 잘 치나 따진다.
"저 친구는 직장 생활도 소홀했나,
어떻게 저렇게 골프를 잘 쳐?" 하는 사람은 없다.
계속 같이 치기를 원할 뿐이다.

지금 정부에서는 소용돌이치고 있나보다.
인사 파괴니, 서열 파괴니 하며 술렁인다.
그럴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들이 경찰 서장이고 아버지는 경사면 어떤가.
아들은 이사관인데 아버지는 사무관이면 어떤가.
아버지가 공직을 떠날 이유가 있는가?
부자지간이 아니라 형제지간도 마찬가지다.
간장 담는 종지와 국 담는 대접이 크기가 다르다고, 쓸모가 다 다른데 밥상에 올려놓지 않을 것인가?

원래 서열이란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걸 부정하면 소외될 뿐이다.
마라톤의 재미는 열심히 뛰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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