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비극 70주년...“절대로 잊혀 진 전쟁이 되서는 안 된다”

[인터뷰]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류재식 서울특별시 지부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06/17 [11:38]

6·25비극 70주년...“절대로 잊혀 진 전쟁이 되서는 안 된다”

[인터뷰]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류재식 서울특별시 지부장

통일신문 | 입력 : 2020/06/17 [11:38]

70년 전 이맘때, 평화로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요란한 총·폭음이 울렸다. 38선 이북지역에서 공산정권을 수립한 독재자 김일성이 이남지역을 점령하고 공산화시킬 목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개시했던 것이다.

치열했던 3년간의 전쟁은 너무나 끔찍하고 부끄러운 통계를 남겼다.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컸다. 공산과 자유,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남북한주민 250여만 명이 전쟁의 포화 속에 사망했다. 수백만의 부상자, 실종자가 발생했다.

남한은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의 전쟁고아, 1천만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80%의 산업 및 공공, 교통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형체도 없이 부서졌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뀐 기나긴 세월이 지났으니 요즘 젊은이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영화나 책에서 상상하는 세상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려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류재식 서울시 지부장을 마포구 공덕동에서 만났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3245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일제시기 춘천은 그야말로 험하고 낙후한 산골지역이었다. 형제는 4남매로 내가 둘째였다. 아버지는 유벌공(물을 이용하여 뗏목을 운반하는 노동자)으로 강원도 산골에서 벌목되는 산업용 통나무를 뗏목으로 한강을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순박하고 고지식한 우리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등이 휘도록 일을 하셨다.

 

- 1950625일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 달라.

내가 18살 때, 중학교 5학년(현재 고2)이었다. 6월 중순부터 춘천 지역에 계속 내리는 장맛비는 그칠 줄 몰랐다. 25(일요일) 아침에 쿵쿵 소리가 나기에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북쪽에서 내려오는 양민 피란행렬이 길게 늘어져 보였다. 춘천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할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2~3일 걸어서 부산을 향해 문막까지 갔는데 인민군이 그 지역을 이미 점령했더라. 소문에 의하면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고 하니 부산 피란을 포기하고 춘천으로 되돌아왔다.

인민군 치하의 춘천 풍경은 저녁마다 반동분자’(노동당 정책을 반대했거나 비난한 사람) 성토회의가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이장, 지주 등이 반동분자였다. 인민혁명위원회는 주민들을 매일 밤 7시부터 11시까지 마을공터나 어느 큰집에 모여 놓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 ‘적기가등 북한노래를 보급하고 사회주의체제 우월성 공부를 시켜주었

 

- 그런 것이 주민들에게 잘 먹혔는가.

의외로 일부는 잘 먹혔다. 해방 후 이남지역서는 북한의 공산정권에 대한 환상이 파다하게 퍼졌다. “토지를 농민에게 준다” “전체 인민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등의 공산당 구호는 충분히 남한 농민들의 호기심을 사고도 남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다. 총을 든 인민위원회 간부와 그 프락치(끄나풀, 첩자)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니 어쩌겠는가.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고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건성모습을 보이면 총화무대에 세운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고 해

부산 피란을 포기하고 춘천으로 되돌아와

춘천 풍경은 저녁마다 반동분자성토회의

마을에서 마을이장, 지주 등이 반동분자

 

인민혁명위원회는 주민을 매일 밤 7시부터

11시까지 공터나 큰집에 모아 적기가

북한노래, 사회주의체제 우월성 공부 시켜

 

 

-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반동분자에게는 혁명의 처단대상이란 글귀의 딱지가 붙고 인민재판’(성토회의)이 열렸다. 당 간부가 죄명을 낭독하고 프락치들의 선동으로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가했다. 대략 5~10분 내로 반동분자는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사흘이 멀다하게 생겼다. 그리고 밤 11시까지 시키는 사상교양 학습은 정말 미칠 지경이다. 하여 사람들은 표현은 못했지만 속으로 공산당에 환멸을 느꼈다.

 

- 인민군의 여성 추행 등은 없었나?

인민군은 남한 점령지 주민들에게 학습, 사상교양, 총화 등을 강하게 시켰고 그들의 사유재산을 마구 빼앗아 착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인들에 대한 성희롱이나 추행, 강간 등은 전혀 없었다. 그것만은 인민군이 잘했다고 본다.

참고로 북한 점령지에서 국군은 인민재산(, 돼지, 닭 등)을 돈이나 군용품을 주고 사거나 구입해 식용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다. 오죽했으면 국군 한 개 소대가 남으로 퇴각하면 그만한 숫자의 북한여성이 임신한 몸이거나 낳은 아이를 데리고 따라 내려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동분자에게는 혁명의 처단대상이란

글귀의 딱지를 붙이고 인민재판이 열려

당 간부가 죄명을 낭독하고 프락치들의

선동으로 그들에게 돌팔매질 가해 죽여

 

- 참전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인민군은 병력이 모자라자 점령지 학생들에게 의용군(전쟁 중에 총 들고 참전한 어린 학생들, 이 가운데 자원입대한 학도병을 소년병이라고 부름) 입대를 강요했다. 나와 학급 또래친구 10여 명이 입대를 거부하고 심심산골에 들어가 50일 가까이 살았다. 밥과 부식물은 부모들이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몰래 날라다 주었다.

그러다가 9·28서울수복을 맞았고 국군의 반격으로 북진이 있었다. 이때 산에서 내려와 친구들과 함께 소년병으로 국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소년병은 학생복에 모자 그대로이고 손에 M1보총 하나 들은 것이 군장의 전부이다.

 

- 학도병(소년병)을 자세히 말해 달라.

대략 14살 이상의 소년들 중에서 덩치 큰 아이들은 우선 입대 대상이다. 그 외에도 크게 질병이 없거나 신체에 하자가 없으면 모두 입대한다. 총을 지급 받았지만 그걸 다루는 방법은 자체로 알아서 습득해야 한다. 학도병들은 주로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식사, 탄약상자, 부상자 등을 운반하거나 장교들의 심부름도 하였다.

 

인민군은 병력이 모자라자 점령지 학생들에게

의용군입대를 강요...학급 또래친구 10여 명이

입대를 거부 산골에 들어가 50일 가까이 살아

음식은 부모들이 감시를 피해 몰래 날라다 줘

 

9·28서울수복을 맞아 국군의 반격으로 북진

이때 산에서 내려와 친구들과 소년병으로

국군에 자원입대...‘소년병은 학생복에 모자

손에는 M1보총 하나 들은 것이 군장의 전부

 

 

- 언제 정규 군인으로 편입했나.

195011월 일등병의 군복을 입고 6사단 수색대대에서 근무했다. 이듬해 6월 부산동래 보병학교(전쟁기간 민간학교를 군대가 많이 사용했음) 6개월 교육을 마치고 장교시험을 보고 육군소위로 임관, 6사단 OO중대 소대장이 되었다.

적과의 격전장에 나가는 선두에는 항상 지휘관이 서야 했다. 부대에서는 전투개시 전 모든 군인에게서 머리카락, 손톱, 발톱을 확보한다. 만약 군인이 전사하면 그걸 갖고 부모형제를 찾아주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해서다.

 

- 실제로 전쟁터는 어떤 상황인가?

아군과 적군 사이 고막이 찢어질 듯 요란한 총포탄 소음 속에 몇 시간씩 교전이 이루어지면 그야말로 시체만 산더미처럼 남는다. 어떤 때는 100여 명의 한 개 중대가 전투에 투입되어 26명만 겨우 살아났던 적도 있었다. 쌍방교전에서 평균 비율로 보면 적군이 70% 아군이 30% 정도의 시체가 생겼다고 보면 된다. 대체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과 미군이, 동부전선에서는 인민군과 국군이 교전을 했다.

 

1950년 일등병 군복 입고 수색대대에서 근무

이듬해 부산동래 보병학교 6개월 교육 마치고

장교시험 보고 소위로 임관 후 6사단 소대장

 

적과의 격전장에 나가는 선두에 지휘관이 서야

부대에서는 전투개시 전 군인에게서 머리카락,

손톱, 발톱 확보...전사하면 그것으로 부모형제

찾아주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해서였다

 

 

- 북진하여 압록강 근처까지 갔었다던데.

인민군의 부산(임시 수도) 점령을 코앞에 둔 1950915,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국군과 UN군은 928일 서울을 수복했다. 국군과 미군의 의기양양한 기세로 10138선을 넘어섰고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했으며 북으로 계속 진격했다. 26일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는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중공군(중국인민해방군) 수십 만 명이 이리떼처럼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 개입(참전)했다. 중공군과 미군, 인민군과 국군이 밀고 당기면서 강계, 신의주, 함흥 등 이북지역에서 2개월간 교전을 벌였고 195114일 후퇴를 했다.

 

1950915,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국군과 UN군은 928일 서울 수복하게 돼

국군과 미군의 의기양양한 기세로 101

38선을 넘어섰고 19일에 평양을 탈환했으며

북으로 계속 진격...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

중공군 수십 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참전

 

 

-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있다면.

교전지인 이북지역 장진, 희천 등지에서 북한어린이들에게 대한민국 애국가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고향인 이남지역 춘천에서 점령군인 인민군에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강제로 배웠듯이 거꾸로 된 모습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아마도 지금 살아 있으면 70세를 넘었겠는데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다.

 

- 영혼탄? 고생탄? 행복탄? 이게 뭔가?

적과의 교전 때 신체가 형체도 없이 파괴되어 즉사한 경우를 보고 영혼탄을 맞았다고 한다. ·다리가 끊어졌어도 목숨이 붙어있으면 고생탄’, 총알이 신체부위를 관통하고 죽지 않았다면 행복탄을 맞았다고 한다. 지금은 다소 웃자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나 당시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복수의 각오로 불린 용어였다. 1953716일 중대장(대위)이 되었고 사흘 뒤 행복탄을 맞고 마산수도병원에 후송되었다.

 

교전지인 이북지역 장진, 희천 등지에서

어린이들에게 대한민국 애국가 가르쳐

고향인 춘천에서 점령군인 인민군에게

김일성장군의 노래강제로 배웠듯이

그때 아이들이 살아 있으면 70세 넘어

통일이 되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

 

 

- 약력은 어떻게 되는가.

병원서 부상후유증으로 전역을 권고 받았지만 다시 손에 총을 잡고 나라를 지키고 싶었다. 병원장(대령)에게 통사정을 해서 부대에 복귀했다. 이후 전방부대서 대대장, 연대장이 되었고 19701년간은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1950년 가을 소년병으로 입대, 국군으로 편입되어 30년이 지난 1980년 예비역 육군대령으로 전역을 신고했다. 둘도 없는 내 조국 자유대한민국을 지켜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것이 가장 명예스럽고 영광스러운 이력이고 자부심이다.

 

-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를 소개해 달라.

20015사단법인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로 설립, 20093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로 변경했다. 6·25전쟁 참전유공자의 친목도모와 복지증진에 이바지한다. 6·25전쟁의 역사적 교훈영구발전과 참전 기념사업 수행을 통해 참전유공자의 명예선양, 국민호국안보의식 고취에 기여하고 있다. 아울러 자유민주주의수호 및 국가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향군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한다.

 

- 6·25전쟁 70주년이다. 어떤 마음인가.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로 생생한 6·25전쟁의 참상이다. 영화와 책, 기록으로도 전해지는 전쟁역사지만 참전용사가 전하는 육성증언은 가치가 매우 대단하다. 6·25전쟁은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우리 세대(80)가 마지막이다.

솔직히 이제 10년 후면 남아 있을 참전용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의 국군장병들이 UN군과 함께 피 흘려 지킨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2001사단법인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설립

20093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로 변경

6·25전쟁참전유공자 친목도모·복지증진에 이바지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로 생생한 6·25전쟁 참상

영화와 책, 기록으로도 전해지는 전쟁역사지만

참전용사가 전하는 육성증언 가치가 매우 대단

 

10년 후면 남아 있을 참전용사는 별로 없을 것

우리 국군장병들이 UN군과 함께 피 흘려 지킨

오늘 자유대한민국...젊은이들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 많아

 

 

-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지난 19506월부터 9월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4개월간 북한공산당이 통치하는 치하에서 살아보았다. 공산당이 홍보용으로 하는 선전과 실제 행동은 다르다. 공산당의 특성은 완전한 독재통치를 위해 인민들을 당국의 말에 절대 순응하도록 강력한 사상 및 정신교육, 인민재판과 총화(회의) 등을 지속적으로 시키는 것이다.

 

- 그런 행위는 지금도 북한에서 계속 된다.

그럴 것이다. 만약 인민들을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혹독한 사상정신 교육이 없다면 북한체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북한이 지금처럼 전범자 김일성 3대가 대대로 세습하며 2천만 인민을 통치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북한주민들에게 독재자의 만행을 낱낱이 알려주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일을 바로 남한 내 탈북민들이 대북전단(삐라)으로 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영웅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동포인 주민들에 정의와 진실 알려주는

탈북민들 대북전단 통제는 유감스러운 일

중요한 것은 빵도 절실하지만 맹목적인

충성과 남한증오사상 바꿔주는 것 급선무

 

 

- 정부가 대북전단을 통제하려 한다.

우리 국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동포인 북한주민들에게 정의와 진실을 알려주는 탈북민들의 대북전단을 통제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북한주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배고픈 빵도 절실하지만 맹목적인 수령충성과 남한증오사상을 바꿔주는 것도 급선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면 불량스러운 북한당국에 비굴한 모습보다는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은 건강할 때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 나라의 평화와 안보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국군의 적은 분명 북한이다. 적에게 먹히면 끝장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덤비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동물이나 사람이나 동일한 생존법칙이다. 야만집단 인민군이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우리는 강하고 또 강해야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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