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지갑이 필요 없는 사람

박신호 방송작가 | 기사입력 2022/11/03 [21:11]

[모란봉] 지갑이 필요 없는 사람

박신호 방송작가 | 입력 : 2022/11/03 [21:11]

<박신호 방송작가>

 

“엄마, 내 지갑 못 봤어요?”

“지갑? 그 걸 내가 아니”

“여기 책상 위에 놔 뒀어요”

“그럼 거기 있겠지 그 걸 누가 아니”

곡할 노릇이다. 어젠 술도 조금 밖에 안 마시고 들어 왔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방송국에 나가게?”

“지금 가려는데 지갑이 없어 못 나가고 있어요.”

“지갑에 돈 있었니?” 

“돈은 무슨 돈이요”

“그런데 지갑은 뭘 그렇게 열나게 찾니. 전차 표 살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

1950년대 말, 20대 초였다. 월급쟁이가 아니라 자유직업인 (프리랜서) 성우(聲優)라 일이 있어야 수입이 있는 신세이니 참 살기 힘들었다. 그래도 매일 방송국엔 나가야 하니 최소한 전차 표 살 돈은 있어야 했다. 남산에 있는 방송국까지 가려면 전차를 타야 하는데 그래 봐야 고작 중앙청이 옆 동네인 통의동 정류장에서 남대문 역까지다. 그러니 타는 거리보다 걷는 거리가 더 멀긴 했어도 전차를 타고 다녔다. 참 처량한 신세였다. 이런 신세니 지갑이 없어도 하나도 불편할 게 없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들어오는 출연료라고 해 봐야 당일에 이래저래 다 나가니 지갑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신세지만 어찌 지갑이 생겼는지 몰라도 늘 지니고 다녔다. 어떤 지갑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런 있으나 마나 한 지갑에 어느 날 일대 놀랄 일이 생겼다. 무심히 열어 본 지갑 속에 뭔가 못 보던 게 들어있는 것이었다. 꺼내 봤다. 놀랍게도 사진이었다. 그것도 여인의 나체사진이었다. 어디서 난 거지? 어젠 외박은커녕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지갑에 여자 나체사진 넣고 다니면 재수 좋다니 넣고 다녀. 누가 아니?!”

엄마가 빙긋 웃으신다. 지갑 없어도 살 수 있는 지겨운 생활을 언제까지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부러 잊으려 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갑은 있었다. 어느덧 좋은 지갑에 눈이 가기도 했다. 악어가죽 지갑이 맘에 들어 몇 번 만지다 말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지갑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왕이다. 물론 영화에서만 본 거지만 왕은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아예 없었다. 위신을 세우기위해서다. 신하들이 다 뒤치다꺼리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왕뿐이 아니었다. 재벌 회장님도 지갑이 필요 없지 않나 싶다. 비서가 따라 다니지 않는가. 비서 없이 다닐 때는? 그것까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다만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걸 영화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없다. 또 있다. 갱 보스다. 알 카포네가 지갑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지갑이 필요 없는 사람이 제법 있다. 얼마나 좋을까. 근심 걱정 없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까. 부럽다, 부러워. 그러다 보니 또 지갑이 필요 없는 부류가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걸인이다. 한 푼 줍쇼, 하며 손을 내밀어 받은 적선을 지갑에 넣는 걸 본 일이 없다. 깡통 아니면 호주머니다. 돈푼이나 좀 들어 온 날도 지갑은 필요 없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 분배해 넣기 때문이다. 왕초한테 쎈타(뒨장질)를 당해도 들키지 않으려고 꼼수를 쓰느라 그런 거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돈이 없어 지갑이 필요 없는 신세가 있는가 하면 돈이 많아 지갑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다. 누가 행복한가?

옛날 우리 선조들은 돈을 휴대하고 다닐 때는 전대(錢袋)나 주머니, 쌈지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전대는 원래 생활필수품을 휴대, 운반하기 위한 것이고. 쌈지는 ‘쌈짓돈이 주머니 돈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의 지갑과 같이 소지하고 다녔던 것으로서 천이나 가죽, 종이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요즘은 지갑 없이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핸드폰 하나만 들고 다니면 결재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땅치 않은 권위주의자 권력가가 많아져서다. 나도 그냥 다닐 때가 있다. 자동차 면허증을 모바일에 저장해 둬 그냥 다니기도 한다. 이게 얼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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