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와 고구마 같은 세상

박신호 방송작가 | 기사입력 2023/06/21 [15:55]

사이다와 고구마 같은 세상

박신호 방송작가 | 입력 : 2023/06/21 [15:55]

꿈도 꾸지 않던 방송국에 시험을 보고 들어가니 전부 선생님, 선배라서 운신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다른 공무원 사회보다 자유롭다는 방송국이었는데도 50년대 말의 서울중앙방송국 분위기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규율이 엄격했다. 마침 서울중앙방송국이 정동에서 남산 초입에 초현대 청사로 새로 짓고 입주했을 때라 촌놈 신세 따로 없었다. 방송국이라고 2층 건물에 직원도 2~3백여 명이나 되나 했건만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어느 직장이나 호랑이 상사가 있기 마련이다. PD 00 선생은 갓 40대에 들어섰으니 나와는 나이로 따지면 10여 년 차이지만 직속 상사일뿐만 아니라 방송계에선 대선배였다. 그야말로 숨도 크게 내지 못하고 지나는 처지였는데 시간도 가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가까이 지내게 됐다. 덕분에 명동 번화가의 비싼 일식집 출입도 하게 됐고 방송국 바로 앞길 건너에 있던 양식당 외교구락부에서 랍스터 요리와 우설(소 혀)같은 양식도 먹어 봤다. 어려운 방송 생활 중에도 뜻밖에 이00 선생 덕분에 입 호강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00 선생에게 먹는 거에 대한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비싼 고급 술집에서 나와서는 2차로 가는 곳이 기껏 포장마차였다. 그러고는 꼭 찾는 것이 있었다. 오뎅 국물이었다. 그것도 두 번 세 번 더 달래 맛있게도 마셨다. 하도 신기해 가끔 힐끔거리면,

? 이상해 보여?”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게 자랐어. 어렸을 적에 어쩌다 오뎅 국물을 얻어먹었는데 그때 그 맛을 영 잊을 수가 없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오뎅 국물이야. 홀짝 마셔 봐

이분은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영화 녹음도 수월치 않게 많이 하던 터라 졸부자 소리를 들었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부족한 게 없었고 부러운 게 없었다. 그런데도 오뎅 국물만은 잊지 못했다. 또 있다. 사이다다. 술 자주 마시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사이다를 좋아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목마를 때 사이다 한 컵 쭉~ 마시는 맛이야말로 뭐에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생은 사이다를 마시지 않았다. 본 적이 없다. 한참 후에야 알고 이유를 물어봤다.

사이다가 싫으세요?”

아니. 좋지

근데 마시는 걸 본 일이 없어요

돈 아까워, 물마시면 되는데 왜 사이다를 사 먹어

물과 사이다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시원하기에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오죽하면 많은 국민이 사이다 같은 정치를 바란다고 말하겠나. 확실히 사이다 하면 우선 시원한 생각이 먼저 든다. 목마르거나 속이 더부룩할 때 한 컵 쭉~ 마시면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다. 그래서들 사이다 같은 정치를 바라는 게 아닌가 한다. 이와 비교해서 고구마 정치를 들먹이는 국민도 있다. 고구마는 먹다가 목이 메기도 한다. 속 시원히 내려가지 못하고 목이 막히곤 하니 답답하기도 하고 숨 막힐 노릇이다. 그래서들 사이다 정치와 고구마 정치를 말하는가 보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돌려 보면, 사이다는 시원한 음료인가? 아니다. 사이다가 시원한 건 냉장에 넣어뒀기 때문에 시원한 거다. 그냥 실내에 있는 건 그냥 마실 수가 없다. 물만 훨씬 못하다. 아무리 사이다가 시원한 음료라고 해도 관리 여하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답한 고구마는 어떤가? 고구마는 목이 메기도 한다. 하지만 구황식품이다. 우리 민족을 굶주림에서 구해준 음식이다. 저장을 잘하면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다. 그런 고구마를 답답한 정치로 비유하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이다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고구마는 없으면 안 되는 기호 식품이며 민족 생존 식품이다.

 

지금 우리는 사이다 정치만 바라고 고구마 정치를 배척하고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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