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되어 간 인민의 지상낙원...“조총련의 만행 알려야”[인터뷰] 북한 재일동포(귀국자) 2세, 탈북민 최정훈 씨북한에서는 일본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재일동포’ 혹은 ‘귀국자’ 라고 부른다. 김일성 수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공화국(북한)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노동당의 품에 안긴 해외동포들로 공민의 영예를 지니고 행복하게 산다고 선전한다. 이들이 북한사회서 각광을 받던 시기는 1970~80년대다. 일본의 친인척이 송금해주는 돈으로 일부 재일동포들은 그나마 중류층의 생활을 하였으니 북한주민들에게는 마냥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단편적 실례를 들면 외화상점 출입이다. 외화상점은 말 그대로 외화(달러, 엔, 위안 등)만 사용하는 곳인데 그 안에는 자본주의나라제품 등 좋은 상품이 가득하다. 외화가 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일반 북한주민들에게는 달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12월은 한반도 6·25전쟁 이후 일본서 북한으로 이주(북송)해간 재일교포들의 첫 출발이 시작된 달이다. 그들에게는 악몽의 서막이었다. 인천에서 북한 재일동포(귀국자) 2세인 탈북민 최정훈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4년 함경북도 청진서 출생했다. 재일동포(귀국자) 출신인 부친이 청진시인민병원 신경과 의사였다. 생활하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었다. 1992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49호예방원 경리과서 근무했다. 당시 시내 소재 직장에는 의학대학 입학 뽄트(TO)가 없었다. 1996년 청진의학대학에 입학하여 2002년에 졸업했다. 청진시 신암구역인민병원으로 배치, 바로 공석이었던 신경과장으로 임명되었다. - 부친은 언제 귀국(북송)했나. 1967년 동료들인 조총련 산하 고등학생 졸업생 300명과 함께 북한에 갔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조총련 간부들이 “공화국(북한)은 무상치료, 무료교육, 무세금 사회이고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 인민의 지상낙원” 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이 구직차별을 심하게 받으니 말이다. 또한 ‘그래? 가보자! 가서 아니면 되돌아오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당국이나 조총련 간부들은 귀국(북송)선에 오르는 재일동포들에게 “한 번 가면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리는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북한에 온 부친의 경력은. 300명 고교졸업생 중 시험 봐서 대학에 간 사람은 2명. 그중 한 명이 청진의학대학에 입학한 부친이다. 졸업 후 청진시인민병원 의사로 근무했다. 모친은 식구 10여명과 1963년 귀국(북송)한 분이다. 재일동포들은 주로 저희끼리 결혼을 했다.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재일동포는 자본주의 일본에서 온 ‘경계대상 계층’이다.
1967년 조총련 산하 고등학생 졸업생 300명과 함께 북송선에 올라...당시 조총련 간부들이 ‘공화국(북한)은 무상치료, 무료교육, 무세금 사회이고 직업선택 자유로운 인민의 지상낙원‘ 이라고 해...아니면 되돌아온다 생각 “한 번 가면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 소리는 일체 하지 않았다고 설명
- 재일동포 북송사업의 내막은 뭔가. 지난 1955년 2월 북한은 6·25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현상 해소목적으로 재일교포의 귀환 추진과 귀국하면 그들의 생활을 전적으로 당국이 책임질 것을 대내외에 공식 천명했다. 이에 호응한 일본은 1958년 각 정당의 고위인사들이 망라된 ‘재일조선인귀국협력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재일교포북송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1959년 8월 13일 일본과 북한은 인도의 콜카타서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그해 12월 14일, 975명의 제1진이 니가타항(新潟港)을 출발, 이후 협정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다. - 북한과 일본의 계략 아닌가. 이후 북·일 양측은 협정연장에 합의, 계속 재일교포북송을 추진했지만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이 알려지자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계속됐으며 총 186차례에 걸쳐 9만 3.339명이 북송(이주)했다. 지난 2004년 공개된 관련 문서에 의하면, 재일조선인은 범죄율이 높고 생활이 어려워 정부지원이 필요하므로 일본 정부가 관련 경비를 줄이기 위한 목적서 북한으로 귀환시킨 걸로 드러났다. - 조총련은 일본서 어떻게 득세했나. 전후 김일성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선노동당 지도를 받는 일본 내 조선인단체) 조직 강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학교, 유치원 등 공공시설 운영을 비롯해 간부양성 등이다. 그러니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이 많이 몰렸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한국정부가 공인한 재일한국인단체)은 사실상 존재감마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미미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대략 10 대 1 규모였다고 한다. 조총련이 10이면 민단은 1이다. - 그래서 조총련이 돈이 많았는가. 사람이 곧 돈이다. 일본에 사는 조선(한국) 사람들은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고 한다. 빠찡고(게임기계), 바(술집), 카지노(도박장), 제조, 서비스, 토목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거금을 벌어 준재벌이 된 사람도 많았다. 조총련 사람들이 북한에 갖다 상납한 돈은 어마어마하다. 평양에 굴러가는 승용차 절반이 일제다.
북·일 양측은 협정연장에 합의 계속해 재일교포북송 추진했지만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이 알려지자 그 수가 줄어 북송사업은 1984년까지 계속됐으며 총 186차례에 걸쳐 9만 3.339명이 북송해
조총련 사람들이 북한에 갖다 상납한 돈은 많아 평양에 승용차 절반이 일제
- 재일동포들의 북한입국 첫 인상은 어떠했나. 현해탄 건너 이국서 태어나거나 살면서 조국(해방 전 한반도)에 대한 향수가 많았던 재일동포들이다.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 북송선(초기에는 러시아선박, 이후 북한선박 ‘만경봉’호)에 부푼 꿈과 희망을 안고 올랐던 재일동포들이다. 그러나 청진항에 도착해서는 ‘아! 속았구나!’ 하고 인차 속단했다고 한다. 환영 나온 북한주민들을 보니 얼굴이 너무 말랐고 옷차림도 남루했다고 한다. 결국 일본에서 심한 인권차별을 피해 ‘사회주의’로 갔는데 그곳이 더 심한 인권차별의 지옥임을 살면서 혹독하게 느낀 재일동포들이라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 - 또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귀국선에 오르는 재일동포들에게 조총련에서는 “조국(북한)에서는 여러분들의 생활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해주니 돈이나 물건은 전혀 가져갈 필요가 없다. 가능한 조총련에 기부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회유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했다고 한다. 결국은 조총련이 일본에 남길 수도 있는 재일동포들의 재산을 가로챈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총련은 그렇게 악랄하고 교활한 깡패집단이다. - 북한서 재일동포 가족의 어려움은 뭔가. 말실수다. 귀국자들은 민주주의사회, 자본주의국가인 일본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과 수령을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북한에서 살자니 많이 불편했다. 말을 잘못해서 광산, 오지로 추방된 귀국자들도 부지기수다. 평양으로 주거지를 받은 귀국자는 조총련 간부 및 친인척, 북한당국에 돈을 많이 기부한 사람 순이다. 전체의 약 0.5% 소수 인원만 평양으로 가고 대부분은 청진, 함흥 등 대도시로 일부는 지방 농촌과 산골로 배치 받았다.
청진항에 도착해서 ‘아! 속았구나!’ 속단 환영 나온 북한주민들을 옷차림도 남루 일본에서 심한 인권차별 피해 ‘사회주의’ 로 갔는데 그곳이 더 심한 인권차별의 지옥임을 살면서 혹독하게 체험하고 느낀 재일동포들이라고 아버지가 늘 강조해
- 북한 내 재일동포 사회를 말해준다면. 북한에 귀국한 재일동포 중 일본의 친인척으로부터 송금 받는 사람들은 대략 30~40% 정도이다. 송금은 주로 귀국선(북송선)을 이용해 인편으로 받는다. 우리 가족의 경우 1년에 적으면 일본돈 50만 엔(한화 500만원), 많으면 100만 엔이었다. 북한서 20만 엔이면 4인 가족이 배 떵떵거리며 1년간 잘 먹고 잘 살았다. - 고위급 오른 재일동포도 있었나. 김정일 시대에 문화예술부 부부장을 지낸 장철(1926년생)이다. 일본서 조선학교 교원으로 일하다가 조총련에 가입하여 간부가 되었다. 1965년 귀국해 북한으로 들어왔고 1966년 내각 문화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노동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까지 했다. 재일교포로 가장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다. 김정일 시대서는 재일교포들의 공직진출이 뚜렷해졌다. 아마도 김정일의 부인 고용희(재일교포 출신)의 영향도 있었을 걸로 본다. 김일성은 말로만 “재일동포들은 돈으로 조국을 받드는 애국자들이다”고 했지 실제는 냉정했다. - 특별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은. 나도 깜짝 놀랐다. 재일동포 1세(일본서 이주한 사람), 2세(북한서 태어나 사람)인데 조선인민군 호위사령부 정치군관, 군(郡) 보위부 정치부부장, 도(道) 당위원회 교육부장 등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일반 인민들에게는 철저한 비밀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출세한 재일교포)의 이력을 보면 대부분 조총련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쌓은 자들이다. 돈으로 계산이 안 되는 그 어떤 특별한 공로로 보여 진다.
고위급 오른 재일동포는 김정일 시대에 문화예술부 부부장을 지낸 장철... 일본서 조선학교 교원으로 일하다 조총련에 가입 1965년 귀국해 북한으로 들어왔고 1966년 내각 문화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노동당 중앙위원 문화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현재 조총련의 활동은 어느 정도인가. 지난 1980년대 말, 동구권 사회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김정일은 새로운 전략을 썼다. 조총련 활동을 대담하게 역공적으로 지하에 들어갈 것을 교시했다. 기존에 민단과 접촉금지도 해제했고 오히려 남조선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라고 했다. 그 이후로 돈 보따리를 갖고 남한에 많이 들어와 정계, 시민단체, 종교, 교육계, 언론 등에 많이 퍼져 들어갔다. 그 영향이 바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한국 정치권의 좌경화는 너무나 북한체제와 흡사하다. 그게 종북이다. -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2010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아들아! 나는 이 땅(북한)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겼다. 자식으로써 아버지 유언을 받들고 싶었다. 4년 전 먼저 탈북한 남동생한데서도 탈북권유를 받고 있던 때이다. 고민을 거듭했고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마침내 모친과 아들, 아버지 유골까지 함께 2011년 12월 두만강을 건넜다.
2010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아들아! 나는 이 땅(북한)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겨 자식으로써 아버지 유언을 받들고 싶어 4년 전 먼저 탈북한 남동생의 탈북권유 받고 있던 때라 고민을 거듭했고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마침내 모친과 아들, 아버지 유골까지 2011년 12월 두만강건너
- 남한에는 언제 입국했는가. 제3국을 거쳐 2012년 1월 대한민국으로 왔다. 3국에 있을 때 김정일 사망 소식을 TV뉴스로 보았다. 욕부터 나왔다. 70세도 못살고 간 인생, 오직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북한주민들 혹독한 굶주림에 가둬두고 통치했던 잔인한 독재자다. 지난 2022년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서 시험을 보고 의사면허취득을 했다. 현재 인천 모병원서 근무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이기도 하다. 탈북민사회 시민단체 활동 및 정치 분야도 다소 관심이 있다. - 앞으로 계획은 뭔가. 조총련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한다. 지난 195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재일교포 9만 3천여 명을 이른바 ‘인민의 지상낙원’ 이라는 감언이설 비단보자기에 싸여진 인간생지옥 북한으로 강제로 북송시킨 조총련이다. 이를 제대로 밝히고 일본 내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북한정권 찬양을 계속하고 있는 엄중행위를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 그것이 한·미·일 동맹협력에도 도움이 되는 지름길이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난 1980년대 김일성의 지하공작 지시이후 조총련간부 자녀가 대거 한국에 들어와 결혼하고 사업도 한다. 한·일 정부가 협력해 법적조치를 취해야 한다. 재일교포 사회도 조총련을 와해시키고 민단을 중심으로 하나로 똘똘 뭉쳐야 한다. 정부는 동북아의 유대인인 재일교포를 포함해 해외 동포들에게 한국인 정체성을 심어줘야 한다. 한국디아스포라를 강화하면 이스라엘처럼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년 총선에서 한국의 좌파가 득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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